락이란 곧 청년문화 그 자체였다. 자유와 해방, 그리고 저항... 락은 그러한 청년문화의 성장과 맞물려 함께 성장했고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수 있었다. 60년대, 70년대는 그러한 청년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지금도 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우리나라의 락은 다른 나라의 락과는 그 태생을 달리하고 있었다. 락은 미 8군무대를 중심으로 해외의 세련된 선진음악으로서 먼저 들어왔다. 락이라고 하는 정신보다 락이라고 하는 음악이 먼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락은 저항을 이야기하기 전에 클럽에서 먼저 손님들을 위해 흥을 돋우기 위해 연주되고 있었다.
그것은 70년대 후반 캠퍼스락이 포크를 대신해 청년문화의 중심에 서고서도 마찬가지였다. 하기는 원래 대학가요제나 이후의 강변가요제가 목표한 것이 그것이었다. 75년 대마초 파동으로 당시 청년문화의 중심을 이루던 포크음악이 크게 쇠퇴하자 그 공백을 체제에 순응적인 다른 청년문화로 대체하고자 한 것이 바로 대학가요제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나 수상곡들을 보면 그 형식은 락이나 민요 등 다양한 참신한 시도를 띄고 있었지만 이전의 포크와 같은 치열한 시대정신을 담아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포크 역시 한계는 있었다. 자유롭게 시대를 노래하기에는 시대 자체가 너무 암울했다. 그러나 대학가요제 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청년문화는 그조차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기성가요의 정서나 문법을 단지 락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통해 구현하려는 구태의연함마저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음악적으로, 그리고 청년문화에 있어 큰 진전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시대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산울림으로도 충분했다. 송골매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라이너스나 옥슨80, 건아들,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79년 박정희가 죽었다. 그해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듬해 새로운 군사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학생들의 총궐기가 서울역회군으로 좌절되며 짧은 서울의 봄은 끝나고, 이어 5월 18일 광주에서의 그 참혹한 사건이 일어난다.
70년대 말 붐을 이루던 캠퍼스락이 80년대 들어 쇠퇴한 데에는 군사독재정권의 의도적인 청년문화에 대한 압살도 있었지만, 바로 그런 시대적 상황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한 마디로 캠퍼스락이 들려주던 사변적이고 개인적이며 쾌락적인 정서는 더 이상 당시 청년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았던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청년들을 짓누르고 있던 것은 5월 15일 서울역회군으로 말미암아 5.18의 비극을 자초했다는, 죽은 이들을 대신해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이었다. 그것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은 캠퍼스락도 70년대 클럽락을 계승한 윤수일이나 조용필의 대중락도 아니었다. 민중가요였다.
민중가요의 시작은 75년 역시 대마초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마초파동으로 다수의 포크음악인들이 구속되거나 음악으로부터 떠나는 등 청년문화의 공동화가 일어나자 그 자리를 자생적인 어떤 문화가 대신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제도권에서 시작된 캠퍼스락과는 분명 다른 움직임이었다. 포크이기도 하고, 복음성가이기도 했으며, 군가이기도 했다. 기존의 가요나 민요의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것이기도 했다. 바로 민중의 노래, 그들 자신의 노래였다. 그래서 민중가요였다.
락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을 전제한다. 그 사유와 정서는 지극히 주관적이며 사변적이다. 시대를 이야기하고 사회를 비판해도 그것은 절대화된 개인의 주관에 의해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다른 어느 누구도 하닌 나라고 하는 개인. 그래서 락은 자유이며 저항인 것이다. 그런 솔직담백한 간결함이, 그같은 직설적인 화법이 당시 청년들로 하여금 락에 열광케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안정된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나 누릴 수 있는 사치에 불과했었다. 그런 개인을 향유하기엔 시대가 너무 비장했다. 그렇게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대가 너무 암울하고 비관적이었다. 81년 쓰여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런 당시의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고 있다. 마치 장송곡과도 같이, 마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시대는 비장했고 사람들도 비장했다. 음악도 따라서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락은 그에 비하면 너무 사치스런 음악이었다.
더구나 또 문제가 락이란 미국의 음악이라는 것이었다. 락이란 자체가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음악이다. 아무리 반체제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반문화적이더라도 락과 힙합이란 그같은 자본주의적 질서 아래서 나타나고 성장하고 또 수용될 수 있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말한 개인적이고 사변적이고 주관적이며 쾌락적인 속성 자체가 바로 그런 기반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에 5.18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한미연합사령부가 광주로의 공수부대의 이동을 묵인 내지는 방관했다는 혐의는 당시 청년들에게 뿌리깊은 미국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속성을 비로소 깨닫게 된 80년대의 학생운동은 70년대의 그것과는 달리 미국에 대한 증오를 함께 갖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의 음악인 락이란 그들에게 배척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즉 서양에서 락이 보다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대중음악의 수용자인 젊은 세대의 정서를 충분히 대변해주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서양에서 락은 청년문화의 성장과 더불어 함께 성장하며 대중문화의 주류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락의 수용부터가 청년문화와는 관계없이 수용되었다. 캠퍼스락이 전면에 나타나고서도 청년문화 안에서 나타난 캠퍼스락조차 당시의 청년문화를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으며 락이 갖는 한계이기도 했다. 정작 락이 그 주수용층이었어야 할 청년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캠퍼스락이나 조용필 등의 대중락이라는 유리된 형태로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중후반 한국락이 반짝 전성기를 맞이할 때도 락이 청년문화의 핵심으로 대중의 핵심으로 파고드는데 실패한 것은 그래서였다. 하긴 당시 백두산이나 부활, 시나위, H2O등 그 누구도 시대를 노래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한국락이라는 자체가 서양에서와는 달리 정작 주수용층인 청년들과 유리되어 나타났고 유리되어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80년대 중후반 댄스음악의 발달은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쾌락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대중에게 더 이상 락을 필요로 하지 않게 했고, 결국 락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말한 들국화가 갖는 의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다. 그렇게 시대에 짓눌려 있던 시대였다. 비장하고 음울하기만 하던 시대였다. 그런 때 들국화는 포크가 갖는 보편적인 시대성과 락이 갖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정서를 하나로 녹여 당시 시대를 대변하고 있었다. 들국화 앨범에 실린 "사노라면"은 원래 노동자들이 가장 즐겨부르던 민중가요 가운데 하나였다. 그 사노라면처럼 들국화는 개인적이지만 그러나 보편적인 시대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포크의 내러티브와 락의 화법을 통해 직설적으로 대중에 들려준 것이었다. 비로소 락과 청년문화가 만나는 시점이었고, 80년대 후반 락의 전성기는 이로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락을 받아들이기에는 당시 한국 사회가 너무 암울했다는 것이다. 락이 갖는 반체제적이고 반문화적인 정서조차 당시의 청년문화는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84년은 신군부의 군사독재정권이 약간의 유화책을 내보이며 한 발 물러섰던 시대다. 그리고 이후 다시 강화된 신군부의 압제는 학생운동권의 이념논쟁과 분열을 불러오게 된다. 아직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락이 아닌 비장한 민중가요였다.
태생적인 한계라 할 만 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리고 일본에서 락이 주류로 자리잡는 과정과 한국에서 락이 수용되는 과정과. 그만큼 한국의 현대사가 왜곡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한국의 청년문화 역시 뒤틀려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가 갖는 비극의 한 단면을 락이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면 의문이 남는다. 조용필이며 윤수일이며 전영록 같이 제도권에서 성공한 락음악인을은 무엇인가? 그래서 락이 대중화를 이루지 못했다면 대중적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이들의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아무튼 중요한 것은 청년문화로서 락이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탓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 락의 전성기를 연 것도 아무래도 시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10대들이었으니. 부활 역시 10대 소녀팬들의 지지를 받던 아이돌밴드였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더 써보도록 하겠다.
급히 쓰느라 조금 허술한데 나중에 손 봐서 본점 2호에 한 번 올려봐야겠다. 자료도 좀 모으고 논리도 좀 다듬고 문장도 손보고 해서. 일단은 여기까지 한 번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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