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논리를 다듬어 보았다. 워낙 오전에 대충 급히 써놓은 글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가 생각한 바를 모두 담아낸 것 같지 않다. 또 그동안도 생각이 더 깊어진 것도 있고.
원래 재미란 긴장에서 나온다. 긴장은 갈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갈등이 있다고 다 긴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는 한 가지 매개가 필요하다. 바로 동의다.
모든 작품에서 작가와 관객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이 동의라는 것이다. 얼마나 작가의 의도에, 작품 내부의 논리에 대해 관객이 동의할 수 있는가. 단지 그것이 소설인가 연극인가 영화인가, 혹은 독자인가 시청자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필연이다. 그래야 한다고 하는 설득력이다. 우연히 길가다 보게 되는 동네야구나 동네축구는 굳이 그에 동의할 필요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그냥 지나가면 그만이다. 맞다. TV프로그램도 전혀 그럴 의미나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바로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다. 그대로다.
왜 게임을 해야 하는가. 왜 출연자들은 그리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는가. 왜 출연자들은 그렇게 악착같이 승부에 목숨을 거는가. 과거 게임위주의 프로그램들은 매회 다른 인기연예인이 출연자로 나서며 그들을 보는 재미로 보고 했었다. 하지만 런닝맨은 그에 비해 고정출연자의 비중이 높다. 항상 보는 얼굴이라면 그에 대한 기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 기대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그것이 갈등이라는 것이다. 첫회에 이효리와 황정음 사이의 신경전이 그렇다. 지난 회차에서는 송중기와 하하 사이에 키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차라리 얼마나 더 많은 골을 넣어 이기는가보다 송중기와 하하 사이의 키를 둘러싼 갈등을 극대화시켜 게임의 중심에 놓았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더 집중할 수 있었겠지. 누가 이길 것인가.
그것도 문제다. 누가 이길 것인가. 그러자면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 승자에게는 그만한 혜택이. 패자에게는 또 그만한 패널티가. 단순히 아침에 커피봉사하는 것 가지고 출연자 자신도 그리 긴장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기면 집으로, 지면 커피봉사... 그 간극이 너무 작다. 출연자로 하여금 필사적이게 하기에도, 시청자가 그에 자신을 이입하기에도. 분명한 패널티와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로써 차이를 드러내고 그것을 긴장의 요소로 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더 갈등은 고조되고 시청자들은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는 출연자들에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부터가 안 되니까.
당장 지난회차에서 성금을 헤아리는 것부터가 그랬다. 아무말이 없길래 돼지저금통에 들어 있는 금액이 모두 같은 줄 알았다. 따라서 돼지저금통을 더 많이 확보하면 성금 역시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지석진이 홈팀이었던가? 상금은 같았고 돼지저금통은 더 많았다. 그러나 차이는 1만원. 상당히 아슬아슬한 차이인데 전혀 긴장이 없었다. 도대체가 왜 거기서 1만원 차이가 나는가에 대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돼지저금통에 들어 이는 돈의 양이 다르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프로그램 가운데 그것이 적절히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했다. 나중에 성금을 헤아릴 때... 그때는 의미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에서 단지 사전정보 없이 금액에 차이가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긴장도 안 되고 당연히 재미도 없고 출연자들은 환호하는데 시청자 입장에서는 뜨악할 뿐이다.
차라리 미리 정보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게임이 끝날 때마다 확인하는 것이다. 몇 개의 돼지저금통이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개는 얼마의 돈이 들어 있고, 몇 개는 얼마의 돈이 들어 있고... 지난회차에서 나왔던 다이빙게임처럼.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린 높이를 모두 더해서 그것으로 점수를 내 경쟁을 하니, 한 쪽에서 더 높이 뛰어내리면 다른 한 쪽에서 또 역시 더 높이 도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높이에서 오는 두려움과 그러나 승부에 대한 긴박함과 그런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상당한 긴장과 갈등이, 재미가 있었다.
돼지저금통을 확보해 놓았더니 얼마가 들어있더라. 이번에는 얼마짜리 돼지저금통 몇 개를 확보했으니 다음에는 얼마짜리가 몇 개 이상 있어야 상대를 이길 수 있다. 이기고 있다고 안심할 수 없고, 지고 있다고 희망을 놓을 필요도 없고, 이번에는 얼마짜리 돼지저금통인가 기대하게 되는 요소일 수 있다. 그냥 다 모아놓으니 그 내용물이 다르더라 하는 것보다는 그런 쪽이 과정에 대한 집중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하긴 솔직히 의심하고 있다. 굳이 지석진이 3.5미터를 뛰어 김종국으로 하여금 10미터를 뛰게 한 것이나, 하필 돼지저금통에서 나온 돈의 액수가 딱 1만 원 차이로 승부가 결정난 것이나. 왜 하필 1만원인가 하는 것이다.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까지다.
도대체가 뭔놈의 몰아주기는 그리 많이 하는가. 몰아주기는 마지막 한 번이면 족하다. 몰아주기란 관객에 대한 배신이다. 승부가 났다. 최선을 다해서 승부가 그렇게 났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승부가 다음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승부와는 상관없이 몰아주기 한 번으로 끝. 학습이 된다. 어차피 게임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몰아주기로 결정된다. 한 번 정도면 모를까 반복되면 역시 게임에 대한 흥미도는 사라진다. 물론 출연자는 재미있겠지만.
잊고 있는 것이다. 버라이어티라면 게임을 하는 자신들이 재미있으면 안 된다. 자기들이 재미있자는 게임이어서는 안 된다. 구경하는 사람이 재미있어야 한다. 누가 이기고 지고보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게임 안에 자신을 이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왜 현대의 프로스포츠에서 그리 프랜차이즈를 중요시여기는가. 프랜차이즈야 말로 팬으로 하여금 팀과 자신을 하나로 여길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 때문이다. 동의다. 팀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버라이어티에서의 게임이란 어찌해야겠는가.
아니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버라이어티란 사람이 재미있어서, 사람이 좋아서 보는 것이다. 그저 재미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웃기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런 건 개그콘서트로도 충분하다. 그보다는 시청자로 하여금 프로그램에, 출연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매력을 느끼고 그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것이 캐릭터다. 혼자서 놀자는 캐릭터가 아니라 시청자로 하여금 이입하여 더욱 프로그램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캐릭터다.
왜 캐릭터인가. 먼저 시청자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어떤 캐릭터인가. 그것을 시청자에게 게임을 통해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게임인가. 캐릭터와 더불어 왜 그곳에서 게임을 해야 하고, 왜 게임에 그리 필사적인가 하는 설득이 필요하다. 그로부터 재미가 나온다.
런닝맨을 보면서 계속 느낀 부분이다. 왜 저들은 저기서 저러고 있는가. 특히 관중석에 숨겨 놓은 돼지저금통을 찾는 과정에서. 그냥 열심히 뛰어다니며 돼지저금통을 찾을 뿐이다. 갈등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누가 더 돼지저금통을 빨리 많이 찾았는가. 하다못해 퍼즐도 없고, 게임도 없고, 출연자 사이의 갈등도 이야기도 없다. 보니까 끝나고 누가 더 많이 찾았더라. 그런 상황에 VJ의 저질체력을 문제삼아 분량을 뽑아낸 것이 유재석다웠다면 다웠다 할까. 전혀 시청자가 비집고 들어갈 여기가 없이 자기들끼리만 열심히 뛰며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런닝맨의 시청율이 고작 그 정도에 그치는가.
보다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네러티브가 필요하다. 게임을 하더라도 필연성을 부여해야 한다. 여기서 왜 이런 게임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게임마다 캐릭터의 개성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출연자의 개성에 어울리는 게임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평온개리의 캐릭터가 부각되었던 포토제닉 게임처럼. 단순한 게임의 나열이 아닌 그 게임들을 유기적으로 엮을 수 있는 얼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게스트보다 고정출연자의 비중이 아무래도 더 큰 런닝맨에 있어 장기적으로 캐릭터를 통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요소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런 내용이 기대가 된다. 단지 두 사람을 세워놓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는.
제작진과 MC유재석, 그리고 출연자들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갈 필요가 있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단순한 게임의 나열이 아닌 그 이상의 가능성을 찾아서. 분명 런닝맨은 그러한 가능성이 풍부하게 잠재된 프로그램이다. 포맷 자체만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는 제작진과 출연자들 스스로 만들어갈 부분이겠지.
아무튼 재미있으면서도 재미없다는 게 이런 것일게다. 부분부분 분명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인상이 약하다기보다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런닝맨이 신경써야 할 부분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오래 가기 힘들다. 너무 약하다. 모자르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게임위주의 버라이어티는 수명이 다했다. 리얼버라이어티도 정답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을 찾자면 새로워야 한다. 무엇으로 그 새로움을 말할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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