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 블로그에서도 그러는 사람들 나온다. 이보다 조금 더 큰 블로그에서는 허구헌날 듣는 소리다.
"글이 너무 주관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이런 편향적인 글을 올려도 되는가."
"객관적으로 사실만 쓰라."
아마 잊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단지 개인이고. 블로그란 단지 내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나는 이곳을 찾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그 어떤 공적인 의무에 동의한 바 없다. 나는 단지 쓰고, 찾은 사람들은 단지 읽는다. 그게 블로그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락이 청년문화의 중심에서 6,70년대 저항문화를 이끌 수 있었던 이유. 지금에 힙합이 락을 대신하여 청년문화의 근간을 떠받칠 수 있는 이유. 바로 그같은 주관성이다.
전까지 세상을 이야기한다는 건 참 고리타분한 일이었다. 뭔가 고상해야 하고 뭔가 진지해야 하고 뭔가 격식을 갖추어야 하고 또 뭔가 공식적인 것이어야 했다. 객관적이어야 했으며 보편적이었다. 그것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룰이었으며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비판하려 해도 그들의 언어로써 비판해야 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선생들에 불만을 품은 학생을 떠올려 보면 되겠다. 선생이란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다. 지적인 훈련도 더 되어 있다. 말과 논리, 지식으로 싸우자면 학생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는 학생들의 불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 학생의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다. 아직 지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학생들의 투덜거림. 그네들의 거칠고 투박하고 어색한, 그러나 진정이 담긴 그런 투덜거림.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그것은 선생이 말하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로 합리적인 논리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말했을 것이다. 80년대 청년문화의 성장기에 어째서 락은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이지 못했는가. 어떻게 이 땅의 청년들은 락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는가. 당시는 보편이 필요하던 시기였고, 객관이 필요하던 시기였으며, 합리가 필요하던 시기였다. 단지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고 감정적인 락의 문법이란 당시의 시대와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90년대 서태지와 듀스가 등장하면서 랩이라는 것이, 아이돌 문화와 만난 랩댄스가 힙합과 이어지며 그같은 가능성을 열어두었달까.
당장 DJ DOC의 가사를 듣더라도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다.
"나는 이것 싫어!"
"나는 이것 좋아!"
참 유치하기까지 한 에고일 텐데, 바로 그런 점이 사람들을 잡아끄는 것이다. 나도 싫으니까. 나도 좋으니까. 주관이, 자의가, 감정이, 그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밀착하여 다가오는 것이다. 전혀 고상하지 않은, 그래서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 영거리의 감수성이.
6,70년대 청년문화가 락에 열광하고 락스타드를 우상화하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들의 이야기였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들의 이야기였으니까. 기성세대는 불쾌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공감하는 그들의 이야기였다. 힙합이 락을 대체하고 만 것은 그보다도 더 주관적이고 직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기 때문이고.
가끔 보게 된다.
"대중이 듣는 음악에 개인적인 감정을 넣어서야 되겠는가."
그게 락과 힙합이 나타나기 전 기성세대의 정서였다. 바로 그런 점을 깼다는 것에 락과 힙합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자기도 그리 깨끗하지 못하면서 무슨 사회비판인가?"
주관적이라는 것은 공식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공식적이지 않은 자리에서는 사실 뭔 소리를 하든 상관이 없다. 살인법이 폭력전과자를 쓰레기취급할 수도 있고, 유아강간범이 성추행범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냥 그 순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고. 다름 아닌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고 보면 락을 하든 힙합을 하든 그렇게 사고를 많이 쳤다. 약물에, 폭력에, 음주에, 성추문에, 심지어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살인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의미가 없는가.
"아, 세상 좆같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고 몇 번이나 정학에 퇴학까지 당한 문제학생이더라도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한 마디 할 수 있고, 그것을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단, 그게 한계일 것이다.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것.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것. 한정적이라는 것이. 보편의 세계를 바꾸려면 역시 보편의 논리여야 할 텐데도 단지 주관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70년대 청년문화가 갖고 있던 근본적인 한계일 것이다. 결국 70년대의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의 문화에 상당부분 투항하거나 타협하고 있었다. 그리 기성사회를 비판하던 락과 힙합의 음악인들이 그런 문화에 길들여지던 것도 그래서였다. 비판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인정한다. 블로그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제대로 된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식화된 언어로써 한 마디 하는 것만 그 의미가 같지 못하다. 보편의 논리로, 보편의 가치로, 객관과 합리로써 행동에 나서는 것만도 같지 못하다. 그리 가치가 없다. 그것이 또 한계다.
아무튼 음악으로써 비판하는 것에 뭐 그리 의미를 부여하고 책임을 따지는지. 음악이란 그저 수다다. 음악인들이 자기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래서 이런 음악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그 자체가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며 개인적이다. 그것을 뭐라 하겠는가.
결국에 그런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락과 힙합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이유일 테지만. 일부에서 탈근대 어쩌고 하며 우리사회의 근대성에서 비롯된 폭력성을 비판하는 것일 테고.
모든 주장은 개인적이다.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단지 그 가운데 비교적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있을 뿐.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가치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이 그런 비판의 근거일 것이다.
참 우스워서. 자격을 갖추어야 비판을 할 수 있다. 말했듯 60년대 락을 바라보던 기성세대의 시각이 그랬다. 자격을 갖추라. 격식을 갖추라. 그것이 한국의 청년문화라는 것이 또 우습다면 우스울 것이다.
재미있다. 무척. 인터넷을 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다양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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