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록은 주로 노동자 계급의 하위문화로써 출발했다. 록이 거칠고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은 그래서다. 많이 배우고 예의와 교양을 갖춘 계급의 고급스런 어법을 알지 못하니.
그래서 록의 근간을 이루는 것도 원래는 펑크였다. 코드 세 개로 끝낸다. 세 개 이상 알면 펑크도 아니다. 얼터너티브도 펑크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었다. 거칠고 단순하고 직설적이고.
그런 록이 대중과 만나는 공간은 라이브클럽이었다. 허름하고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좁은 라이브클럽에서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록과 대중은 만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록이 라이브클럽을 벗어나면서, 수백만장의 앨범과 수만의 관중 앞에 대규모 콘서트가 치러지면서 록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건 나중에.
60년대 개라지록부터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단지 악기가 있고, 마음에 맞는 친구가 있기에, 서툰 솜씨이고, 어설픈 음악이지만, 자기들의 이야기를 자기들만의 연주에 담아 실여 들려주던. 그렇게 록은 그들의 음악이었고 특히 카세트테이프와 카세트플레이어가 일상화되면서 더욱 쉽고 값싸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그들은 바로 이러한 그들만의 음악에 열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로써 록은 전세계로 퍼져나가며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록이 들어오는 경로가 조금 남다른 데가 있었다는 것. 미 8군을 통해 들어온 록은 주로 성인클럽에서 유희를 위한 음악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정작 록의 주체는 청년이어야 할 텐데도 정작 한국의 록은 청년들이 주로 갈 수 없는 장소를 통해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족관계와 아직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배경은 록을 소비해야 할 청년들에게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공간 "자기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록은 주관적이다.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립적으로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여 그 안에서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공유하는 것은 라이브클럽이다. 그런데 또 이 라이브클럽이라는 것도 당시는 없었다. 성인클럽은 청소년이 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대학생들에게도 그리 가까운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들국화를 필두로 일어난 라이브문화는 또 하나의 해방구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경우도 정작 노동자의 아이들이 공연을 찾아가기엔 그 비용이 또 만만치 않았다.
즉 정작 록을 소비해야 할 주체인 노동자계급 이하에서는 사실상 록을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기타 하나 사기도 빠듯한 살림에 그들이 음악에 직접 참여하기도 무리였고, 음악을 들으려 해도 카세트플레이어가 기본이었는데 그조차도 없는 집들이 적지 않았다. 청년들이 가족들로부터 유리되어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려 해도 자기방이 없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콘서트를 가려 해도 돈이 있어야 간다. 당시 콘서트 관람료가 내 한 달 용돈보다 더 비쌌다. 고등학교 가서는 조금 오르기는 했지만.
80년대 그렇게 우리나라의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했었다. 거꾸로 서구에서 록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계급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며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악기를 살 수 있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수다늘 소유할 수 있었다. 자기만의 공간이 있었다.
실제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몇 공장 다니던 형들은 작지만 자기 방도 있었고, 자기 오디오기기를 살 수도 있었기에 무척 팝에 빠져 지내고 있었다. 집에 돈을 부치고 남은 돈은 오로지 음악에 쏟아붓는 것이었다. 그래봐야 알량한 카세트플레이어에 카세트테이프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 형 역시 라이브는 무리였다. 80년대 그렇게 노동운동이 극성으로 일어난 이유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지금은 진짜 많이 좋아진 것이다.
결국 유럽과 미국에서는 노동자계급에 의한 하위문화로써 생산되고 소비되던 록은 정작 우리나라에 와서는 그 의미가 크게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미국의 문화로써. 보다 앞서고 세련된 선진국의 문화로써. 그리고 그 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계급에 의해서. 그런데 그것이 원래의 록의 소비층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록은 우리나라에 와서는 그 정신보다는 양식으로써 소비되었다. 어차피 영어였다. 영어가사 알아듣고 록을 듣는 사람도 얼마 없었다. 록이 추구하는 정신이나, 록을 이루는 근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록이 들려주는 음악적 양식에만 관심이 있었다. 앞서 말한 장르적인 엄밀함이란 여기서 비롯되었다. 록이란 정신이 아니라 형식이었으니.
음악적으로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음악적으로 어떤 양식을 추구하고 있는가. 어떤 정형화된 음악장르로써 록을 소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게 어디 록이냐?"
하지만 록은 그렇게 끊임없이 바뀌고 나뉘고 발전해 왔더라는 것이다. 말랑해서 록이 아니면 60년대, 70년대 소프트록은 록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듣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의 록이라고 하는 양식화된 장르의 음악을 통해서였으니까.
아무래도 생산자로써보다 오로지 소비자로써만 록을 대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생산자로써라면 어떤 형태이든 자기가 록이라 하면 록일 테지만, 소비자로써라면 록이란 어떤 양식을 뜻할 테니까. 록을 체화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노동자계급이, 그 청년들이 록을 소비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했을 때는 김완선과 박남정 같은 댄스가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서태지가 나타났고. 듀스가 나타났고. 일렉트로니카의 화려하고 강렬한 비트는 록의 음악적 양식을 대신하게 되었고, 힙합이 들려주는 직설적이고 거친문법은 록의 문법을 대신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록은 더 이상 세계대중음악에서 주류의 자리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록이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강제로 떠밀렸다는 차이가 있달까?
아무튼 지금도 록을 듣는다는 이유로 무슨 특권의식에라도 사로잡힌 듯한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것을 떠올린다. 록이란 단순히 대중음악이었고, 특정 계급의 청년들이 자기 이야기로써 공감하고 공유하던 음악이었다. 그저 허세를 부리려 듣던 음악이 아니라. 바로 그런 특권화가 록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정작 록을 주도적으로 수용해야 할 계층에서 록을 체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러고 보면 얼마전 라디오스타에서도 노브레인 멤버들의 집안이 그렇게 좋았다. 크라잉넛도 꽤 괜찮은 집안 출신이다.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나, 대구에서 제법 산다는 김도균이나, 김태원이야 뭐, 이근형도 집안이 좋았고, 김세황 역시, 신해철도. 가난한 노동자계급에서 올라온 많은 해외의 록스타들과는 달리 한국의 록스타들은 꽤나 먹고살만한 집안에서 자라난 경우가 많았다. 아마 그런 차이가 아니었을까.
록을 생산하는 입장에서나, 록을 소비하는 입장에서나, 록의 발상지에서는 철저한 하위문화로 시작한 것이 우리사회에서는 어떤 고급스런 양식화된 문화로써. 그런 위화감이. 모순이. 어쩌면.
확실히 방대하다. 몇 가지 중간에 빠진 것도 있고 한데 뭐가 뭔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아마 틀린 것도 몇 있을 텐데. 그런데 이런 것들을 내가 언제 어디서 듣고 읽었던 것일까? 기억도 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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