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믿음과 인정...

까칠부 2010. 9. 12. 07:45

참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는 개념이다.

 

추리소설에도 나온다. 용의자가 있다. 무척 의심스럽다. 그래서 추적해 조사한다. 그런데 증거가 나왔다.

 

"이거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가설이다. 그런데 논문을 보니 근거가 구체적이다.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일단 논문 자체로 보았을 때 부정할만한 여지가 없다.

 

"이거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물론 그러고 나서 그것을 반박하고자 따로 연구하는 것은 재량이다. 누가 뭐랄까?

 

누군가를 의심한다. 혹은 누군가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과 그것이 사실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주장은 단지 주장일 뿐이다.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때 사실이 되는가. 그를 뒷받침할 타당한 근거가 있을 때다. 그것은 반증 가능한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증언이라거나. 관찰 가능한 어떤 구체적인 현상, 혹은 사실이라거나. 직접 확인 가능한 구체적인 물질적 증거라거나. 단지 이럴 것이다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때문에 이렇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 까마귀가 날아갔으니 배가 떨어진 것은 까마귀 책임이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맸으니 저 놈이 도둑놈이다. 예전에 그렇게 많이들 죽었다.

 

솔직히 이번 신정환 건도 그놈의 지인... 그러나 그동안 언론에서 보통 지인 팔아먹었는가? 관계자 어쩌고, 전문가 어쩌고... 하지만 대개는 기자의 창작이었다. 소설이었고. 심지어 실명 가지고도...

 

그런데 이 실명은 의미가 있다.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확인하면 되니까. 당사자에게 찾아가서 확인하지 않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또한 무의미하다. 하물며 당사자조차 밝혀지지 않고서는.

 

그래서 일단 "지인" 어쩌고 나오면 패쓰한다. 인터넷에 내가 어쨌다더라, 확실한 인증 없어도 패스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확인하느냐는 것이다. 단지 주장에 불과한 것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소설도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논리적으로 헛점이 있으면 소설에서 개연성이 무너진다. 단, 그래서 소설에 존재하는 것이 전제다. 소설 내부의 논리성을 완결시켜주는 규준.

 

그래서 또 논리적이라 할 때 절대 빼놓아야 할 것이 "라면"이다. 이렇다면 저렇다면. 그것도 확인가능한 것이어야지 단지 추측만으로. 이 역시 의미가 없다. 단지 심정적으로 어떻다. 저떻다. 하지만 그것을 사실로써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단은 보류.

 

그리고 역시 앞서도 말했지만 반증가능성이 있다면 반증을 해야 할 텐데 그 구체성에 대해서도다. 예를 들어 타블로의 경우 스탠포드 성적증명서가 위조된 것 같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스탠포드에 보내서 의뢰하면 된다. 동명이인인 것 같다. 역시 간단하다. 동명이인을 찾으면 된다. 단지 이럴 것 같다. 주장이다. 보다 더 구체적이고 확실한 수단이 있는데 단지 자의적인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새벽부터 잠결이라 잘 정리가 안 되는데, 아무튼 감정적으로 믿는다 못 믿는다, 의미가 없다는 거다. 그건 믿음의 영역이고 감정의 영역이다. 그러나 인정한다, 부정한다. 혹은 수용한다, 거부한다. 그건 감정의 차원이 아니다. 사실에 대해서 그것은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수용이고 인정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가.

 

주장이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황이거나 추측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체적인 반증 가능한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엄밀하게 그로부터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직접적이고 합리적이며 타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어야겠지. 그 전까지는 단지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단지 논리가 그러하니. 주장이 그러하니. 그러나 대부분 보면 결국은 "라면"이라. 혹은 내가 보기에 이렇다는 주관적 판단에 불과할 뿐. 그러나 믿음의 논리가 들어가고 나면 그것은 어느새 사실이 되고.

 

참 이런 뻔한 글을 쓰는 것도 꽤 귀찮은 일인데. 아마 중학교, 아니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 배우지 않나? 그냥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책 한 권만 주워 읽어도 나오는 내용일 터이니.

 

그래서 이루, 태진아와 최진희인가 하는 여자와의 공방에서도 서로 구체적인 증거 없이 말로만 떠들 뿐이라 어떻게 결론나나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그걸 어찌 확인하나? 심증은 있었지만 심증이 곧 사실은 아닌 것이겠지. 신정환의 경우는 이제 거의 사실이 드러난 것 같고.

 

단지 그럴 것 같다는 것과 그렇다와의 차이를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으니 좀 더 지켜보자와 그런 것 같으니 일단 들이밀고 보자. 때로는 단지 그를 대하는 작은 태도의 차이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많이들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누가 그러던데, 너는 생각이 너무 많다. 복잡하다. 인정. 참 피곤하다. 이런 짓거리도.

 

내가 싫어하면 더 디스를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좋아하면 칭찬이 인색해지고, 싫어하면 비판이 인색해진다.

 

성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