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 시나위
그대앞에 흰국화꽃 한송이는
크게뜨는 내눈에 눈물이었고
시작도 끝도없는 사랑이기에
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그대를 진정 사랑하리라
나만이 홀로 잊지않으리
핑크빛 커피잔에 흐르는 노래는
화사한 여인의 달콤한 미소도
내 뺨위에 눈물은 지울수 없어라
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그대를 진정 사랑하리라
나만이 홀로 잊지 않으리
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그대앞에 난 촛불이여라
- 작사:안준섭
- 작곡:신대철
가사 출처 : Daum뮤직
딱 보기에도 죽음에 대한 노래다. 흰 국화, 눈물, 그리고 촛불... 죽음에 대한 메타포다.
그래서 애절하다. 임재범의 목소리는 어쩌면 그 가슴을 헤집는 비극에서 더 빛을 발한다. 아마 유현상이 말했을 테지. 임재범은 록보다는 소울이다.
그는 가슴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다. 흉성이니 하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 저 밑에서 힘으로 뽑아 올려 토해내는 사람이다. 그것이 소울이다. 그의 노래에 사람들이 이내 감동하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원래 시나위의 시작은 신대철이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3년이었다고 한다. 1967년생이지만 생일이 2월이라 학년이 1년 빨랐다. 당시 신대철은 센세이션이라는 교내밴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교내밴드라는 것이 다 그렇듯 뻔한 음악들 뿐이라 보다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헤비메탈을 연주해보고 싶은 욕심에 만든 밴드가 바로 시나위였다. 시나위란 음악시간에 우연히 국악에서의 즉흥연주를 뜻하는 "시나위"라는 단어를 듣고서 결정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뭉친 멤버가 베이스에 안준섭, 드럼에 김정휴, 보컬에 주준석, 당시 많은 밴드가 그러했듯 레드제플린과 DC/AC의 음악이 그들의 주된 레파토리였었다. 그러나 한 살 많았던 안준섭은 졸업, 김정휴는 고3에 올라가고, 더구나 주준석이 군대 가 버리면서 이들의 짧은 만남은 그해 겨울 잠시 멈추게 된다. 그때 약속했다고 한다. 주준석이 군대에서 제대하면 다시 모여 밴드를 하자.
물론 주준석이 군대 가 있는 동안에도 시나위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신대철을 중심으로 시나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진찬규라는 보컬을 만나고, 또 오디션에서 이제는 시나위보다 더 유명해진 김종서를 뽑아 내세우고, 그러나 아마 당시도 신대철은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의기투합했던 원년멤버이자 초대보컬인 주준석이 제대해 돌아오기를. 그리고 함께 시나위를 함께 하기를. 단지 그 동안에도 시나위를 그만둘 수는 없었기에 보컬을 바꿔가며 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듬해 신대철은 군대 갔던 주준석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신대철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으며 슬픔이었다.
당시 신대철의 심정이 어떠했는가. 노래를 들으면 알 수 있다. 노래 가사는 역시 함께 의기투합하여 시나위를 만들었던 안준섭의 것이었고, 멜로디는 주준석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애도하기 위해 쓴 신대철의 것이었다. 그것을 완성한 것은 주준석의 뒤를 이어 시나위의 보컬을 맡은 임재범이었다.
그 어떤 사운드보다도 묵직한 감성이. 무겁게 내려앉는 그 비극적인 감수성이. 그러나 슬픔조차 이기고자 하는 그 끝없는 에너지가 느껴지는 이 명곡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나위의 시작에 대한 비화와 함께.
저번 잠시 잊고 빼먹은 말이 있다. 시나위라는 이름에 대해서. 그 가치에 대해서. 왜 많은 이들이 한국의 대표밴드로 시나위를 꼽는가.
그렇게 믿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사람에게 헤비메탈은 맞지 않는다. 한국어로 된 헤비메탈이란 맞지 않는 옷과 같다. 절대 불가능하다.
무당이 헤비메탈이라고 들고 나온 사운드는 확실히 본격적인 헤비메탈이라기에는 손색이 있었다. 여전히 주류무대에서 가장 무거운 사운드를 들려주는 것은 윤수일밴드 정도였다. 80년대 중반까지 오로지 윤수일밴드만이 제대로 된 록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런 때 과연 한국에서 헤비메탈이 가능하겠는가.
비슷한 일이 80년대말, 90년대 초에도 있었다. 한국말로 랩이 가능하겠는가. 당시 DJ로 유명했던 김광환씨조차 방송에 나와 단언하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국말로 랩은 불가능하다."
이현도도 아마 90년대 중반 어느 인터뷰에서 그리 말했을 것이다. 서태지가 나타나기까지 자기들도 한국어로 랩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겼다고.
그러면 신철은? 붐붐은? 홍서범은? 나미와 붐붐으로 "인디언 인형처럼"에서 랩을 했던 신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랩으로 된 노래 "김삿갓"의 홍서범은? 하지만 그런 것을 랩이라 해야 할까? 라임도 플로우도 없이 그저 읊조리기만 하는 것을. 제대로 된 랩이라면 리듬감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서태지가 나오면서 제대로 랩이라는 것이 부각되었고, 그리고 듀스가 제대로 한국적인 힙합을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나오면서 우리나라 대중음악에서도 랩이란 거의 필수요소처럼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과연 지금의 한국 대중음악에서 - 특히 댄스음악에서 랩 빠지면 뭐가 남을까?
당시도 그랬다. 무당을 보면서, 윤수일밴드를 보면서, 그러나 너무나 대단하기만 한 해외의 밴드들과, 특히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의 라우드니스를 보면서, 체념과 부러움섞인 목소리로,
"한국에서 메탈은 안 돼."
그리고 그것을 깨버렸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서태지가 몸담았던 밴드 시나위에 의해서. 1986년 나온 시나위 1집은 한국 헤비메탈 - 나아가 한국 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포효였던 것이다. 우리도 이만큼 할 수 있다.
실제 시나위가 나오고 시나위를 필두로 그 해 부활의 1집이 나왔다. 백두산의 1집이 나왔다. H2O와 작은하늘도 이듬해 자신들의 데뷔앨범을 내놓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국 록의 부흥기 - 아니 전무후무했던 한국록의 전성기였다. 단지 하지 않았을 뿐 당시의 대중은 - 젊은이들은 그들을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나위의 1집이 그 음악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평가받는 부분이 바로 그런 것이다. 시나위 1집은 그야말로 개척자였다. 미지의 영역에 도전하여 길을 여는 선지자였다. 그로 인해 부활도, 백두산도, H2O도, 작은하늘도 가능했었다. 카리스마와 외인부대와 사하라와 블랙신드롬과 블랙홀과...
정말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음악이 가능하구나. 우리나라말로도 이런 사운드가 가능하구나. 우리나라 연주자에 의해서도 이런 소리가 들리는구나.
각인이라 할 것이다. 신대철이야 말로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다. 그 이전 부활이 시나위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던 언더그라운드시절은 잘 모르니. 그런 언더그라운드 공연까지 쫓아다니기에는 공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거리가 조금 있었다. 시나위야 말로 시작이었고, 신대철이야 말로 처음이었다.
아무튼 아직 풋풋하던 시절의 임재범의 목소리라는 것이. 더구나 그것이 감기몸살 걸린 목소리다. 방위 입대를 앞둔 목소리이기도 하고. 지금의 목소리와 비교해 본다면...
문득 듣고 만 것이다. 임재범의 라이브앨범에서 한참 나이가 들어 원숙해전 임재범이 부르는 "그대 앞에 난 촛불이어라"를. 그리고 그리워져서. 아아, 한참 그렇게 빠져 지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물론 좋아하기로는 김바다가 있던 시절의 시나위를 더 좋아한다. 메탈시절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앨범은 김종서와 함께 했던 4집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1집을 잊지 못하는 것은. 임재범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처음에 대한 각인이기도 한 터라.
밤에 어울리는 멋진 노래다. 임재범은 정말 멋지게 노래하는 보컬이다. 신대철은 멋지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고. 그가 만들어내는 멜로디며 기타연주는 또한 그렇게 멋지다.
음악을 들어본다. 그 시절로 돌아가서. 아주 먼. 돌아갈 수 없는. 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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