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The Men - 아름다운 강산...

까칠부 2010. 9. 1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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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 신중현_TheMen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술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 곳에 내가 있고, 네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 희망을.
하늘은 팍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 마음.
우리는 이 땅 위에,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 곳에,자랑스런 이 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은 저 바다와 함께 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 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영원한 이 곳에 우리의 새 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은 내 마음, 나의 마음은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 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사랑은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가사 출처 : Daum뮤직

 

솔직히 나도 이선희 버전으로 처음 알았다. 내가 이 세대가 아니다. 그리고 놀랐다. 우리 나라에도 과연 이런 음악이 있었구나. 그리고 나중에 다시 원곡을 찾아듣고 나는 참 음악을 헛들었구나.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가운데 하나. 그리고 한국록사상 최고의 대곡. 이보다 더 멋진 연주와 이보다 더 멋진 멜로디와 이보다 더 멋진 가사란 존재할 수 있을까.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만들어낸 몽환적인 사운드는 한국록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시 이루어낸 것 같다.

 

장중하고, 드라마틱하고, 몽환적이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한강을 바라보는 것처럼. 한강 너머 남산과 남산타워와 빌딩들과 물 위를 오가는 유람선들과. 헤트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자동차들이 있다. 꿈결처럼 모든 것이 흐릿한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당시 김정미는 19살이었다. 1953년생이니 1972년 졸업이었을 것이다. 그 전해 고3 때 그녀는 김추자와 마찬가지로 신중현의 사무실을 찾았다 픽업되어 신중현사단에 합류한다. 신중현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의 보컬훈련을 아무런 반발이나 거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김정미 하나 뿐이었다고.

 

집안도 좋았다. 아버지가 운수업을 했다던가? 아마 그런 것이 그녀로 하여금 조금은 낙천적인 성격을 갖게 했을 것이다. 또 그런 점들이 신중현의 조련을 거쳐 신중현의 음악과 가장 걸맞는 목소리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들어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이 여자가 갓 스무살 된 여자인가. 김정미가 은퇴한 것이 그녀의 나이 23살 때였다. 대마초파동으로 신중현이 잡혀가고, 가요계를 정화한다고 김정미의 음반을 수거해 불태우던 그때. 그녀는 영영 한국대중음악계를 등지고 말았다. 1977년 두 곡인가 내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감감무소식. 정말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묘하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감정표현이 부족해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느낌? 모든 감정을 초월하여 그것을 내려다보며 부르는 듯한 그런 이질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묘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 섹시하다 하는 것일 테고.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마 사이키델릭.

 

신중현이 줄곧 추구해 왔던 사이키델릭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사이키델릭이 한창 퇴조하던 때 한국에서는 신중현이라고 하는 거장에 의해, 그의 음악적 동지들에 의해, 김정미라고 하는 탁월한 보컬에 의해 그 정수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최고의 음악으로.

 

김정미의 목소리와 아마 박광수의 목소리와 신중현의 목소리일까? 여러 악기 소리와 그만큼이나 다양한 여러 목소리가 어우러지며 만화경처럼 색색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마치 합창처럼. 그보다는 자연의 울림처럼. 꿈결처럼. 아침 안개가 흘러가듯. 마치 격류처럼 뒤엉키며 흐른다.

 

다만 아쉽다면 그 만들어진 배경이랄까? 생뚱맞게 아름다운 강산을 외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차라리 사랑노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빗속의 여인이나, 봄비나, 미인이나...

 

그러나 1972년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신중현의 인생을 - 아니 한국 대중음악사 전반을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목소리는 말했다.

 

"임자, 애국 한 번 하지?"

 

당시는 박정희가 지지율이 떨어져 김대중의 추격에 똥줄이 타던 때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게 되자 온갖 부정과 편법을 동원하고, 심지어 지역감정까지 부추겨 가까스로 이기던 무렵이었다. 그는 요구하고 있었다.

 

"정부를 홍보하는 음악을 만들어달라!"

 

그 무렵 신중현은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길러낸 최고의 히트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 밴드로서는 아직 크게 빛을 보지 못했어도 그의 손을 거친 노래며 가수들은 히트 보증수표나 다름없던 터였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있었다. 신중현 사단이라고. 일본에도 고무로 사단이라고 있었지?

 

그래서 아쉬운 게 많던 박정희에 의해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그에게 정권홍보노래를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중현은 뼛속까지 록커였으며 음악인이었다. 아티스트였다.

 

"나는 정치따위는 잘 모른다. 못 하겠다."

 

 

 

그러고서 내가 할 수 있는 애국이란 이런 것이라고 들고 나온 것이 이 노래였다. 처음 이 노래를 방송에서 연주할 때 듣고 있던 육영수가 자리를 떴다고. 그리 불쾌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무척 확실했다. 선거에 이기고, 다시 정권을 쥐게 되자 박정희는 그 집요한 뒷끝을 작렬하게 된다. 수많은 이를 불구로 만들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만든 뒷끝은 신중현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거짓말이야"는 불신사회를 조장할 수 있기 떼문에, "뭉치자"는 북한과 뭉치자는 것이냐? 신중현 최고의 히트곡인 "미인"은 저속하고 퇴폐스럽다고. 김추자도 장시 중정 연회에 불려가 노래부르는 것을 거절했다고 그녀의 춤이 간첩 접선신호라는 어처구니 없는 누명까지 쓰고 있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신중현호의 침몰의 시작이었다.

 

거의 100여 곡이나 되는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이고, 심지어 신중현 자신마저 1975년 대마초 흡입 혐의로 구속되고. 어이없는 것은 정작 신중현을 처벌할 근거였던 대마관리법이 이듬해인 1976년 4월에야 국회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저격이었다. 정권에 밉보였으니 더 이상 음악을 못하게 만들겠다.

 

미국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던 그가. 일본의 음반사로부터도 온갖 최고의 대우을 약속받으며 건너갈 것을 제의받던 그가. 트로트 일색이던 한국 대중음악에 서구에 뒤지지 않는 세련된 사운드와 멜로디를 도입한 그에게. 그러나 정권의 뒷끝은 신중현이 갖는 음악적 가치나 신중현 음악의 예술적 가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내가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으니 꼴보기 싫다. 그래서 아예 꼴도 안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절망의 시절이었다. 신중현의 아들 신윤철이 동생 신석철과 만든 밴드 서울전자음악단의 음악을 보면 당시 "죄인의 아들"이라며 선생으로부터도 학교 친구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따돌림당하던 이야기가 나온다. 신중현 자신은 물론 그 아들들에게까지도 인고의 시간이었으리라. 오로지 노장을 읽으며, 아끼던 악기며 음악장비며 하나하나 팔아 견뎌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감옥에, 정신병원에, 더구나 그의 손길이 닿은 음반들이 모조리 수거되어 불타버리고. 그것은 자기 자식을 불태우는 것 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박정희가 죽고 다시 복권된 신중현은 당시의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했다 말하고 있었다. 하기는 1970년대 클럽을 장식한 것이 록이었다면 1980년대는 디스코가 주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겨우 밴드를 만들어 클럽무대에 서려 해도 더 이상 그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란 없었다. 시대는 바뀌었고 그가 설 무대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클럽무대에 맞게 댄스곡이나 만들어볼까 해서 만든 음악이 김완선의 "리듬속에 춤을"이었다. 원래는 신중현 자신이 부를 생각이었다고.

 

물론 그렇다고 그의 음악적 열정이 사라졌는가. 다만 잊혀진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중음악계는 더 이상 그가 활동하던 시절과 달랐다. 무대가 사라져버린 음악인은 전설이 되어 버릴 뿐이다. 록의 전설이라 불리우게 되었을 때 그는 화석이 되어 버렸다. 그의 음악적 성과란 모조리 잊혀진 채.

 

더 안타까운 것은 1975년 대마초구속이 비단 신중현에게만 미치고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파동이었다. 말 그대로 파동이었다. 수많은 록음악인들이. 포크음악인들이. 그리고 이어진 가요계정화운동. 대중음악은 긴 암흑에 빠져들게 되었다. 실력있는 음악인들이 자의 아니면 타의로 음악을 등지고, 그나마 살아남은 음악인들조차 대세에 투항하게 되었을 때 한국 대중음악의 역동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1975년에서부터 들국화가 나타나던 1984년까지는 한국 대중음악의 암흑기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김정미도 이때 은퇴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어쩌면 전설이란 비극이 있어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음악이라는 것도, 아니 예술이란 자체도 비극이 있어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문득 듣는 아름다운 강산이 이 땅보다, 이 하늘보다, 이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나는 음악인이다. 음악 하는 사람이다. 어떤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음악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음악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래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한 음악인의 진정이 담겨 있는 음악이기에. 그 분노의 삶이, 그러나 그가 이루어낸 음악적인 업적들이. 그러한 삶이 그 안에 있기에.

 

도저히 1972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지 않는 세련된 음악과 그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19살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는 원숙한 보컬, 그리고 개명한 20세기,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그런 배경들이. 비극이 있어 음악은 더 아름다운 법이니까.

 

 

참고로 이 노래는 1973년 이듬해 김정미에 의해서도 다시 한 번 리메이크 되었는데, 그러나 김정미 하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듯 그리 뜨지는 못했다. 좀 목소리가 대중적이지 못하다. 음악들도. 신중현이 키운 가수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 못한 가수다. 지금은 음반을 구하려 해도 일본에 가서 구해야 한다던가? 아래는 바로 그 김정미 버전의 아름다운 강산이다.

 

그 어느때보다도 음악이 풍성했던 시절. 수많은 가능성이 태동하던 시절. 그러나 정치 한 번 잘못 하는 것만으로도. 그럼에도 또 그 시절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시절을 좋다며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그 시절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이들과. 그러나 시절은 이렇게나 흘렀고. 시간이란 어쩌면 그 무엇보다 잔인한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무심해서. 하늘은 그렇게 무심하며 그래서 잔인하다. 단지 사람들만이 따뜻한 하늘을 그릴 뿐이다.

 

이 노래를 처음 발표한 것이 신중현이 The Men이라는 팀을 만들어 활동할 무렵. 앨범에 수록된 것은 아마 장현과 함께 앨범을 내면서였을 것이다. 맞던가? 멤버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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