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슨 복인 것일까? 음악의 신이 갑자기 나에게 - 한국인들에 느닷없는 변덕으로 축복이라도 내린 것일까? 어떻게 음악프로그램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예능을 통해 이리 자주 만나게 되는가 말이다.
참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리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그새 저렇게들 늙었구나.
조영남에 대한 내 기억은 언젠가도 썼던 것처럼 자기 노래는 안 부르고 남의 노래만 나와서 부르던 이상한 아저씨였다. 히트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꽤 유명인 대우를 받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었다.
김세환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참치회를 전문으로 하는 횟집 사장. 그 전에는 미성의 선이 고운 꽃미남 가수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꽃미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목소리까지 꿀을 바른 듯 감미로웠다. 노래를 부르는 것을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윤형주는 노래보다는 CM송으로써. 아마 들어 보았을 것이다.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열두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멕시코 치클처럼 부드럽게 말해요. 롯데껌처럼 향기롭게 웃어요."
참 투명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고작 몇십초 분량의 CM에서 한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라인을 뽑아내는 능력은. 80년대 CM송 가운데 아, 할만한 것이라면 거의 윤형주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송창식은 저 가운데 유일하게 가수로써 기억한다. 지금도 떠오르는 기억,
"가나다라마바사아차카차파하..."
한글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가요톱10이라는 프로그램을 처음 알고 아마 처음 들은 노래가 그것이었을 거다. 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에 그리 잘 생기지 않은 얼굴로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노래를 부르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노래가 갖는 가치는 나중에야 알았었다.
1968년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서도 매우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해였다. 이 해 펄시스터즈가 "님아"로 데뷔했었다. 한대수도 미국에서 돌아와 첫음반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운타운에서 명성을 쌓은 트윈폴리오가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국대중음악은 대충 세 가지 갈래로 발전해왔었다. 기존의 전통가요라 불리우는 트로트와, 미 8군을 중심으로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라이브무대를 통해 서구음악의 형식을 받아들인 클럽무대, 그리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형성된 다운타운이었다. 다운타운은 포크를 통해 그 양식을 받아들였다.
시작은 당연히 커버곡이었다. 조영남과 송창식, 윤형주 등이 세시봉의 무대에 섰던 것도 바로 외국의 팝을 커버해 부르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점차 자기만의 가사를 붙여 쓰며 번안곡이라는 것이 나왔다. 트윈폴리오가 처음은 아니지만, 바로 그들을 통해 포크는 외국의 곡과 우리의 가사를 통해 대중음악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과연 이들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한국 대중음악에 포크는 뿌리내릴 수 있었을까?
단지 번안곡만이 아니었다. 트윈폴리오로 한창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송창식과 윤형주는, 그러나 오히려 트윈폴리오를 해체하면서 음악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하게 되었다. 특히 송창식이 직접 쓰고 부른 주옥같은 노래들은 70년대 한국 대중음악을 정의했을 터였다. 아니 1975년 대마초파동 이후 가요계정화운동으로 수많은 포크 음악인들이 사라진 가운데서도 여전히 주류무대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80년대 초 그때도 그는 주류무대에서 다른 가수들과 함께 순위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였다. 아마 포크와 - 아니 서양의 대중음악과 국악의 만남에 있어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낸 이 가운데 하나도 송창식이었을 것이다.
윤형주와 김세환은 이미 내가 그들을 인지하기 시작할 무렵 거의 가수로서는 활동을 않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조영남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여러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하긴 주류무대에서 음악을 않는다고 아예 음악을 않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윤형주는 너무나 주옥같은 CM송들이 있었으니.
그 시작이. 조영남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은 그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히트곡이라는 것들도 거의 번안곡들이고. 자주 부르던 노래들도 남의 노래들이고. "화개장터"와 "도시여 안녕"을 제외하면 내게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직접 한 것이 없어도 송창식과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등을 끌어준 것만도 그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이장희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그러고 보면 또 당시 다운타운의 통기타 가수들은 포크라고만 정의하기 뭣한 것이 이장희의 경우도 록에 한 발 걸치고 있었다. 한대수도 록과 블루스를 걸치고 있었고, 송창식도 록과 국악을 아우르는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그 표현하는 형식이 통기타와 포크의 그것을 빌고 있었을 뿐.
아무튼 트로트 일변도의 한국 대중음악을 한 번에 뒤바꾸어 놓은, 서구의 세련된 양식미의 팝음악이 한국의 대중음악에 - 대중의 정서에 녹아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1968년, 펄시스터즈가 있었고, 한대수가 있었고, 사이먼과 가펑클이 아쉽지 않은 트윈폴리오가 있었고. 그 해. 그 중심이 바로 세시봉이었던 것이다. 바로 저 자리에 모인 그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그리고 아마 느낀 사람 있을까? 창법이 참 독특하다. 요즘 부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가요보다는 성악에 가깝달까? 하긴 조영남도 서울대 음대 출신이고, 송창식도 성악을 전공하려 예고에 진학하고 있었고, 윤형주도 교회 합창단에 있었다.
아니 우리 어머니도 노래를 부르실 때는 그렇게 부르신다. 소리를 조금 당겨서 안에서 울리는. 그제 보았던 남자의 자격에서의 실버합창단의 목소리가 그것이었다. 은방울 자매도 그런 식으로 불렀다.
음악이란 원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것이었다. 특히 유럽의 음악은 신과의 소통을 전제로 발전했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상에 옮기는 것이 유럽인이 추구하던 음악세계였다. 그리고 근대화와 더불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유럽인이 구축한 클래식 음악이었고. 유럽인들의 민요라는 것도 그렇게 성립하고 발전했다.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그같은 발성이 옳은 것으로 여겨졌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이야 록에, 흑인음악에, 다양한 음악적 장르와 양식들이 혼재되며 보다 사람의 목소리에 가깝게 발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저런 식의 발성을 간직한 이는 아마 지금 그다지 없지 않을까. 내가 카라의 목소리를 좋아하는 이유일 테지만. 목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을.
아마 그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어떤 순수함과 미덕들이 사람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음악이 원래 추구했던 본연의 목적, 그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이 넘치며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이 아닐까.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내공도 내공이겠지만 어느새 공감해버린 그런 감수성들이 마이다. 이하늘이나, 김나영이나, 길이나, 김원희나, 무엇보다도 모니터 너머로 지켜보던 나 역시도. 그런 순수가 사랑받던 시절의 기억이 어느샌가 저 깊은 심연에서 끄집어 올려지듯.
물론 지금에는 지금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은 더 못한가. 그보다는 이제껏 모르고 있던 세계를 접한 벅참과 같은 것일 게다. 당시는 당연했어도 지금은 이리도 귀하니. 단지.
참으로 과분한 성찬이었다. 80년대도 보기 힘들었던 조영남과 송창식과 윤형주와 김세환의 합주라니. 이건 예능이라기보다는 음악프로그램이었다. 토크도 있는 음악프로그램. 바로 그 때 그 시절처럼 네 사람이 모여 하나로 음악을 연주해 들려주는. 이보다 의미깊은 프로그램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한 번 손도 맞춰보지 않고서도 바로 저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아무런 준비 없이도 한 순간 기타줄을 퉁기며 서로를 맞춰갈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세월의 농익음이. 그들이 살아온 시간 만큼이나 두텁게 쌓아 올린 그 감수성들이. 그런 것들이 있어서.
김세환은 어느새 저렇게나 늙었다. 고운 외모에 미성이었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목소리가 거칠다.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아예 부어버린 송창식의 얼굴 하며. 윤형주도 꽃미남과였을 텐데.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세월을 잊은 듯 흘러나오는 목소리란 시간을 다시 그 시절로 되돌려 버린다.
추석선물로서는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정성이 너무 갸륵하다. 출연료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아낌없이 자신의 노래와 연주를 들려준 네 사람도. 그리고 우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던 이하늘도. 길마저 눈물을 글썽이던 것이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겠는가.
근래 최고의. 과연 다시 있을까 싶은 최고의 방송이었다. 그것도 아직 한 주가 더 남아있다니. 본방사수를 다짐하며. 감동이란 바로 이런 것일 터다. 음악이 줄 수 있는 - 방송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이었다.
나는 오늘 역사를 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려 보았다. 시간은 흘러 있었고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음악은 한결같이 모든 것을 간직해 들려준다. 너무나 고마운 값진 시간이었달까?
간만에 송창식의 노래를 찾아 들어봐야겠다.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거슬러. 이번 회차 영상은 반드시 영구소장해야지. 이런 소중한 선물을 준 놀러와 제작진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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