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있다. 닭에게 주인의 손이란 먹이를 주는 손이다. 닭은 주인의 손이 나타나면 쪼로로 달려가 주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그런데 어느날 그 손은 먹이를 기대하고 쪼로로 달려간 닭의 목을 잡아 비튼다.
경험칙의 오류에 대해 흔히 들어 설명하는 예 가운데 하나다. 닭에게 분명 주인의 손이 "먹이를 주는 손"이라는 것은 경험에 의한 상식이었을 터다. 누군가 그 손이 자신의 목을 비틀게 될 것이라 경고했더라도 닭은 그 말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와 싸우려 들지 않았을까.
상식이라는 것이 그렇다. 상식이란 원래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경험과 지식들. 하지만 보편이란 절대가 아니다. 얼마든지 예외가 있을 수 있고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과연 10년 전의 상식이 지금도 상식일까? 5년 전에는 상식이었는데 지금은 아닌 것들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대부분의 경우 개인적인 경험과 보편적인 지식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개인적인 경험이 집단의 주관적인 합의를 거치며 일반화되는 경우도 상식으로 통한다. 말하자면 주관의 절대화일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많은 지식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다들 그리 말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지성의 역사란 그같은 상식과의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새로운 지성은 항상 기존의 상식에 도전해야 했다. 도전해야 했고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그렇게 상식은 깨어지고 새로운 지식이 상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전을 끝까지 극복하여 남은 상식들에 대해서는 "법칙"이니 "원리"니 하는 "진리"의 타이틀이 주어졌다. 최소한 그것을 따른다면 오류는 없으리라. 물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언젠가 새로운 도전에 밀려나는 것도 있으리라.
웃기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아는 상식에 비추어..."
"내 경험에 따르면..."
문제는 과연 그것이 전혀 오류란 없는 "진리"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법칙인가? 아니면 원리인가? 아니 법칙이나 원리에 대해서도 다른 변수에 의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과연 절대적인가? 아니 최소한 객관적으로 검증이라도 된 것인가?
그러나 그런 것이 상식이니까. 상식이란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보편이란 때로 절대적인 것으로 오용된다. 객관적인 것으로 혼동된다. 그것이 집단에 의해 - 동류에 의해 검증된 때에는. 자가검증이란 자기 발을 자기가 간지르는 것이나 같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주인이 목을 비틀러 다가와도 먹이를 기대하고 오히려 다가가는 닭이란 것은. 그래서 닭대가리라는 말도 나오는 것일 테지? 다른 말로 새대가리. 조두.
상식이 진리가 되는 것은 그 상식을 의심하고 그에 도전할 때다. 의심하고 도전함으로써 그것이 검증되었을 때. 그래서 지성이란 곧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이라 하는 것일 테지만.
그놈의 상식, 상식, 상식... 어줍잖은 상식으로 그것이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 양. 멋대로 단정짓고, 의심하고, 멋대로 단죄하려 들고... 반성이란 없다. 그것이 상식이니까.
차라리 멍청하면. 차라리 나쁜 놈이라 나쁜 짓에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으면. 사이코패스가 다른 게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자기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 생각없는 놈들이야 말로 가장 큰 해악이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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