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에서 김태원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관객이 너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고 있다고 믿고 불러야 한단 말야."
글쓰는 것도 그렇다. 과연 들어와 읽는 사람들이 좋게 받아들여주리라는 기대 없이 쓰기란 쉬운가?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벽 보고 이야기하기,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하물며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미워한다 생각해 보라.
마광수 교수도 말한 바 있다. 무언가 쓰려 할 때마다 뒷꼭지에서 누군가 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블로그에서도 가장 많던 특정 그룹에 대한 글이 사라진 것 아닌가.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도 글을 쓴다?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도 말을 한다?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도 작품을 낸다? 거부당할 것을 알면서도 음악을 한다? 집밖을 나가기도 두렵다는데?
음악이란 결국 소통이다. 글쓰기든 뭐든 창작이란,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은 그들과 소통하려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들의 반응을 기대하고. 일단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들어주리라는. 최소한 누군가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그런데 그게 없다면?
사람이 갖는 공포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소외에 대한 공포다. 어쩌면 죽음보다 더 큰 것이 소외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는 것. 거부당하는 것. 부정되는 것. 사람은 결국 무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더욱.
그러나 그런 것이 되는 사람이 그리 흔한가. 결국에는 무리를 이루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주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적의까지 인식하게 된다. 그로부터 공포를 느끼게 되고서 과연 그는 대중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리라는, 대중이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리라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믿음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 서고, 가능하겠는가?
차마 원망조차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화도 못 내고 있었다. 그저 울고만 있었다. 자기를 탓하면서. 자기가 사람들에 얼마나 밉보였는가를 탓하면서. 저항할 수 없는 공포는 때로 자기파괴를 불러온다. 저항할 수 없는 공포를 만났을 때 차라리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현실을 이해하려 든다. 인지의 부조화 가운데 하나다. 차라리 자기를 탓하고 마는 것. 그런 상태에서 타블로의 재기는 가능할까?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할까봐 집밖에도 못 나간다는 그가 말이다.
어쩌면 우리사회는 또 한 사람의 재능있는 음악인을 이렇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겠는가.
신중현은 두 말 할 것 없는 천재였다. 1960년대, 70년대 신중현과 견줄수 있는 음악인은 최소한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하지만 고작 몇 년간의 활동정지가 신중현의 재능을 빼앗아가 버렸다. 그로부터 음악인으로서의 열정과 활력을 가져가 버렸다. 과연...
어떻게 해도 타블로의 패배다. 이건 어떻게 해도 타블로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중이 그에게 등을 돌린 이상. 대중이 그를 거부하고 부정한 이상. 단지 의심을 했을 뿐이라? 컵을 컵이라고 믿어달라 말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그 자체가 거부이고 부정이다. 콩을 콩이라 하는데 의심하면 도대체 어쩌라고?
결국 승리자는 왓비컴즈. 별 찌질한 악플러 하나에 13만이라는 병신과 그 이상의 중립적인 척 하는 생각없는 떨거지들이 만들어낸 공범이라 하겠다. 분명히 경계했어야 할 악플러에 대해 사회현상 어쩌고 하며 관용하려 들었던 하재근과 같은 이들이. 참 마음에 들어하던 블로거였는데. 악플러에 대한 신뢰가 너무 컸다.
누군가는 말하겠지.
"잘못했다."
또 말할 것이다.
"미안하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거면 경찰따위 필요 없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 할 디스라면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비난이나 인신공격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뭘로 보상하게? 타블로라고 하는 하나의 재능이 다시 우리나라 음악계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음악으로 만족을 얻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엇으로 보상하려는가? 배라도 가르려는가? 아니면 바다에 몸이라도 던질까? 쥐약이라도 먹고 댓가를 치를까?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돌아올 것인가. 과연 이러한 행동들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조금의 오류나 잘못의 가능성은 없는가? 바로 그런 게 진정한 상식일 테지만. 실컷 떠들고서는 이제 와서 그놈들이 나쁜 거야.
반성이라는 것을 좀 해 봤으면. 양심이 있고 뇌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무엇이 잘못이었는가. 그동안 자기가 했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과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게 인간이라는 것일 테지만.
답답할 따름이다. 타블로가 이대로 주저앉지 않았으면. 끝까지 자기를 믿고 일어설 수 있었으면.
여전히 대중이 두렵다면 차라리 대중을 무시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한국 대중따위. 우습지.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정의로운 만큼 잔인해진다. 지혜로운 만큼 잔인해진다. 생각이 없을 때.
생각들을 좀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타진요는 제외. 나는 그들에 대해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사람은 사람 말을 알아들을 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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