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광대란 천직이었다. 어디에서나 광대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 온갖 차별을 견뎌내야 했고, 가난을 이겨내야 했으며, 자칫 고용주의 변덕에 목숨을 잃을 것을 두려워해야 했었다. 삐에로의 눈물은 그런 뜻이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도 삐에로는 사람들을 웃겨야 했다. 당장 빵이 없어 가족이 굶주리는 동안에도 삐에로는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웃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내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어도 무대에 선 순간 삐에로는 모두를 웃길 수 있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조차 삐에로에게는 단지 웃음의 소재다. 뚱뚱하고, 말랐고, 키가 크고, 키가 작고, 얼굴에 점이 있고, 눈이 크고, 눈이 작고, 모든 것이 웃음의 소재가 된다. 자기의 모든 것이 사람들을 웃기는 소재가 된다. 그대신 그는 웃음거리가 되리라. 모두에게 비웃음을 사는 존재가 되리라.
벌써 손주를 볼 나이에도 어린아이들은 그들을 쫓아다니며 이름을 부른다. 별명을 부르고, 반말을 하고, 때로 짓궂은 장난을 한다. 그때도 그들은 웃어야 한다. 아무리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아무리 부당한 현실을 맞아서도 대중 앞에서 그들은 항상 웃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안다.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망가뜨렸던 한 코미디언을. 웃음이란 자기를 깎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피와 살과 같은 것이다. 자기를 불태워 나누어주는 빛과 같은 것이다.
근심으로 웃음을 잃은 이로 하여금 웃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절망과 좌절에 주저앉은 이로 하여금 웃게 하고 살아갈 힘을 갖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던가.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광대였다. 삐에로였다.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불공평과 불합리와 비논리가, 그런 가운데서도 삐에로는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자기를 낮추고 웃음을 주었다.
아마 가장 위대한 이들일 것이다. 웃음을 잃은 이들을 위해 웃음을 되찾아주는 그들은. 스스로 굴욕을 자처하고, 스스로 망신을 당하며,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그들은. 가장 낮은 곳에 스스로 임함으로써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그들은.
그러나 그를 위해 그들은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그런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즐겨 할까. 그런 바보스런 말과 몸짓으로 망신을 자초할까. 과연 코미디속의 캐릭터가 나라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두렵고 혼란스러운가. 슬플 것이다. 아플 것이다. 내가 그런 입장이라면.
나같으면 얼굴이 빨개져 말 한 마디 못할 상황에서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자기를 소재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한다. 자기를 부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나누어준다. 사람들이 웃는 웃음이란 그렇게 그들이 갈기갈기 쪼개어 나누어준 코미디언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이경규가 김국진이 분장하고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울컥하는 느낌을 가졌다는 것. 아니 이경규와 김국진, 이윤석의 어설픈 연기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다는 것. 그들은 베테랑이었으니까. 최고였으니까. 망가질 이유가 없는 최고의 예능인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개그맨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자기를 낮추는 분장은 그들이 느낀 어떤 슬픔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웃음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비극과 희극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 어제도 그렇지 않던가. 남자의 자격 멤버들이 보여주었던 분장실 강선생님은 분명 코미디였다.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그러나 말미에 눈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만일 이경규와 김국진이, 이윤석이 그 상황에서 넉살좋게 웃음을 터뜨렸다면.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 대중 앞에서는 끝까지 웃음을 지킬 수 있는. 비극의 와중에서도 마지막에 배우가 천연덕스럽게 웃을 수 있을 때 그것은 코미디가 된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배우가 낙천적인 웃음을 잃지 않았을 때 그것은 코미디가 된다. 더없이 두려운 공포물에서도 마지막에 배우가 해맑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코미디다. 슬픔을 아우르는 것. 두려움마저 아우르는 것. 그것을 온전히 감당할 것은 코미디언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
어쩌면 과거 인민을 이끌던 주술사들이 저러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앞으로를 전하고 방향을 제시하던 제사장들이 바로 저러했을 것이다. 불안 속에서도 낙천을. 두려움 속에서도 긍정을.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좌절 속에서도 행복을. 그들은 그렇게 잊고 있던 내면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사실 한 번 썼던 내용이다. 웃음과 페이소스. 과연 그 페이소스란 무엇인가. 보통사람이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슬픔을. 아픔을. 분노를. 그러나 그것을 낙천으로, 그리고 긍정으로써 웃음으로 승화시키 수 있는 것.
"아무렇지도 않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잘 될 거야."
"멈추지 않아도 돼!"
"주저앉지 않아도 돼!"
"웃음처럼 네게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희극이 갖는 의미다. 희극배우가 갖는 가치다. 삐에로가 우리들에 필요한 이유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든 광대를 필요로 했던 이유다. 인간은 낙천과 긍정으로써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
"나는 개그맨이다."
그 한 마디가 의미하는 바를,
"평생 이 일을 하고자 한다."
그 한 마디가 뜻하고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하고 난 뒤에는 허탈함이 찾아온다. 자기마저 내던지고 난 다음에는 어디에서 자기를 찾을 것인가. 그렁이는 눈물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기꺼에 웃음을 위해 자기를 내던질 수 있었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어쩌면 삐에로의 눈물이 아닐까. 웃음에 가려진 채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는 그 눈물이 아닐까. 모두의 웃음을 대신하는. 육체의 고통 앞에서도 오로지 웃음만을 생각할 수 있는 그들은. 자기가 아프고 고통스러워도 웃을 수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그들이란 것은.
그런 것을 두고 페이소스라 하는 것일 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그 낙천과 긍정이. 그 희망과 낙관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멋진 세상.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존재한다. 그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이 주는 웃음이. 찬사를 보낸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웃을 수 있다면. 그 웃음을 자기 것으로 만들수만 있다면.
그들이 주는 웃음에 감사하며. 그래서 더욱 뻔뻔하게 그들이 주는 웃음을 누린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들은 웃길 것이고 나는 아랑곳않고 웃으려 하리라. 그들은 위대하다. 삐에로의 눈물이란. 사랑한다.
덧. 다른 제목을 떠올리려니 생각나는 게 없다. 이 이상이 없다. 젠장. 어쩔 수 없이 그냥 쓴다.
삐에로의 눈물....
세상에서 가장 갚진 하나에 대해서. 그 눈물은 참으로 아름답다.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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