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무한도전 - 그래서 우연한 만남이 그리 반가운 것일 게다.

까칠부 2010. 10. 24. 01:13

"우리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텔레파시..."

 

그러나 자막과는 달리 과연 텔레파시란 통했는가? 그리 엇갈리고 있었다. 서로가 있는 장소를 알고서도. 남산 팔각정에 있는 것을 알고 여의도 공원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무려 두 번을 서로 오가고 있었다. 과연 텔레파시였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알기는 뭘 아는가? 6년의 시간이다. 6년의 시간을 함께 하고서도 그리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다. 같은 시간과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서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들이 다르다.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또 누군가를 더 반가워하고 그리고,

 

정형돈이 택시 안에서 박명수를 보고서도 내려서지 않은 것도. 그러면서도 길을 만나서는 그렇게 반가워한 것도. 항상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들. 하지만 또 반드시 그것이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정형돈은 장충체육관에 있지 않았고, 박명수는 유재석과 함께이기에 남산 팔각정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알고 있다고 예단하는 것이란 얼마나 위험한가?

 

나는 오히려 텔레파시 미션이란 서로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무모함이 주는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힌트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서로 따로였다. 정준하와 하하가 장충체육관에서 만났지만, 여의도 공원을 거의 같은 시간에 함께 하고 있으면서도 정형돈과 길과 박명수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장충체육관에서도 아주 약간의 시간차이로 정준하와 하하는 정형돈과 길과 엇갈렸다. 마지막 정준하와 하하와 노홍철이 여의도공원에서 정형돈, 길과 만났을 때 그와 1분 차이로, 아니 유재석과 박명수가 탄 차가 그들이 탄 차를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텔레파시가 어디 있어? 텔레폰은 있다! 텔레비전도!"

 

현실에서 소통하는 것은 텔레파시가 아니다. 이신전심이 아니라 텔레폰이다. 불립문자 염화시중이 아니라 텔레비전이다. 구체적인 무언가를 통해서 사람들은 소통을 한다. 막연한 믿음이나 기대가 아니라 구체화된 언어와 문자와 영상을 통해 서로에게 자신을 전하고 또 알아간다.

 

무려 11시간, 그나마 중간에 힌트가 있었다. 힌트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시간 안에 다 모일 수 있었겠는가? 처음 서로가 간 장소에 대한 힌트가 있었고, 퀴즈를 통한 힌트가 세 차례 주어졌다. 그러고서도 그렇게 엇갈리고 있었다. 의지할 것은 텔레파시 뿐. 그러나 텔레파시가 있었는가?

 

많이들 저지르는 실수다. 알아주겠거니. 이해해주겠거니. 그래서 그렇게들 오해를 하게 되고, 오해가 쌓여 멀어지게 되고, 영영 인연이 끝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처럼. 말없이 걸어가며 뒤를 돌아 보았을 때 같은 시간에 마주 뒤를 돌아보아줄 가능성이란 얼마나 되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헤어진 것이었다. 서로 솔직히 털어놓고 보다 솔직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서로 등을 돌린 채 멀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건만.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에. 그런 엇갈림이 그렇게 보여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소통부재의 사회란 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모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여의도공원에서 움직이지 않는 박명수다. 그리고 서로를 찾아 서로가 있는 자리로 이동하며 엇갈리던 박명수와 유재석, 노홍철과 하하와 정준하다. 너무 믿어서도, 그렇다고 너무 불신해서도. 하지만 그 전에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소통의 수단인 핸드폰을 빼앗긴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엇갈림이 만들어지는가 말이다.

 

우리는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가? 우리는 제대로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오해없이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란 과연 진실인가? 내가 알고 있는 그것이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인가? 그와 나는 같은 것을 보고 있는가? 같은 것을 듣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프로그램은 거기에서 적당히 예능적으로 끝냈지만 숙제일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핸드폰에, 인터넷에, 소통의 수단에 매달리는. 그러나 그 소통의 수단마저도 때로 엇갈리는 이유가 되는.

 

정의하자면 "엇갈림의 기원론"이랄까? 어쩌면 그러한 답답함이 전하는 바가 그것이 아니었겠는가. 보는 내내 안타깝고 답답하던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이 아니었겠는가. 일상에서 숱하게 경험하던 것들. 알게 모르게 겪게 되고 쌓여온 것들이. 그때 그랬다면. 그때 그랬었다면... 인생이란 후회를 쌓아가는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만남이란 반가운 것인 모양이다. 그렇게 알고서도 만나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엇갈리기가 일쑤인 거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긴 만나서 이야기하다 꼭 나온다.

 

"너도 거기 있었어?"

"너도?"

 

그러나 그런 만남들은 왜 인연이 되지 않는가? 인연이 이어지고서도 그렇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를 보고 만나고 얼싸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기적인가?

 

"만나면 꼭 안아줄 거야."

 

다짐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반가운 사람일수록. 오래 떨어져 있었을수록.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났을수록.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 꼬옥 안아주게 된다. 눈앞의 이 사람이 실제인가 확인하려는 듯이. 지금이 현실인가 꿈이 아닌가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우습기보다는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었다. 매번 엇갈림이 쌓일 때마다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을 쥐어뜯고. 어째서 저렇게밖에 못 만나는가. 저렇게 엇갈려야만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내 오랜 어떤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다만 차이라면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엇갈리면 그것으로 영영 끝일 테지만, 예능이기에 여러 차례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서로 만날 때까지 엇갈림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일까? 판타지일 터다. 끝나고 나서 약간은 공허한 이유일 테고.

 

시사성이 있을까? 그런 건 모르겠다. 오히려 자막이야 말로 어떤 기믹이 아니겠는가? 비아냥이 아닐까? 소통한다 여기면서도 정작 그 6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서로 엇갈렸던 것에 대해. 그것을 위로하는 자막의 엇갈림에 대해. 생각케 된다. 그런 오해들에 대해. 이제는 잊혀진 기억들을.

 

많은 것을 떠올린 회차였다. 많을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회차이기도 했다. 과연 나는. 우리는. 그 시절에는. 이런 것이 연륜일 터다. 무한도전도 연륜이 쌓였다. 그 깊이를 본다. 설사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에 무한도전이기에 가능했던 모습들이 아니었겠는가.

 

좋았다. 무척. 예능으로서는 몰라도 나로서 만족스런 시간이 아니었는가. 스치는 상념들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