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망자 - 스릴러의 정석...

까칠부 2010. 11. 17. 23:37

스릴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욕망일 것이다. 악이라는 게 그렇다. 순자가 악이라 했을 때도 그것은 욕망이었다. 그리고 유혹이었다. 필름 느와르 이후의 전통일 것이다.

 

참 괜찮게 짜여진 시나리오다. 비록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양형사와 카이의 사랑이라든가, 진의 생존과 복수에 대한 욕망, 도반장의 명예욕과 현시욕, 그리고 무엇보다 욕망 그 자체일 탐정들. 그랬지. 이 드라마에서는 악역의 존재감이 너무 약하다. 송재호는 너무 안으로 숨는다. 악의 끝이어야 할 양회장이 너무 그 욕망을 숨기고 있다. 악이기는 한데 드러나는 욕망이 없다. 오히려 물욕을 숨기지 않는 이박사나 탐정 나까무라 황쪽이 악역에 더 어울린다. 그들의 욕망은 진하고 그리고 순수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금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 탐정 지우와 진. 지우의 탐욕을 의심하고 복수의 수단으로 금에 집착하는 진의 모습은, 전혀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때문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금을 앞에 두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생존에 목매고, 겨우 복수의 단서를 잡았기에 일어난 그녀의 욕망은 그 순간 지우의 탐욕을 잡아먹는다.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한다. 경찰조직의 배신에 이은 도반장의 배신으로 이야기가 한 번 크게 틀어지더니, 탐정들의 탐욕에 편승한 배트맨의 배신으로 다시 한 번 틀어지고, 여기서 진의 배신이 이야기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매개로써 존재하는 것이 욕망. 그 가운데 진의 욕망이 가장 극적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여전히 캐릭터에 몰입하고 있지 못하는 지우. 시나리오가 원래 그런 것인가? 도무지 지우의 캐릭터에서는 어떤 설득력도 개연성도 발견할 수 없다. 과장된 연기 가운데 순간적인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이어지는 선이 없다. 감정의 선도, 사고의 선도, 어떤 유기적인 연결이 없다. 따로 떨어진 파편과 같은 존재. 그래서일까? 진의 흔들림과 배신 앞에서도 지우의 모습은 이전의 느와르에서의 탐정과는 달리 동떨어져 보인다. 마치 배경에 존재하는 화분 하나, 벽돌 하나처럼.

 

진은 그나마 점차 형체를 갖추어가고 있다. 조각조각 쪼개진 파편들이 모이며 하나의 구체적인 형상을 띄어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그녀의 배신은 어느새 공감할 수 있었다. 예상하지는 못했어도 그러나 그녀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에 대해서는... 아마 여전히 비를 버리지 못하고 지우가 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소피의 캐릭터는 조금 더 독해질 필요가 있겠다. 그녀가 양회장을 배신한 것은 다른 어떤 욕망보다 카이에 대한 사랑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 이박사의 앞을 가로막을 정도의 집착이라면 그녀는 더 독해져야 하고 더 잔인해져야 한다. 그런 류의 캐릭터로써는 보기 드물게 순정파다. 동정은 가는데, 그러나 양회장이 굳이 그녀를 카이의 곁에 붙여둔 개연성이 사라진다. 아무리 봐도 소피와 양회장을 잇는 선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아니었다면 소피의 비중과 역할도 꽤 중요해졌을 텐데.

 

아무튼 점점 스릴러답게 감정과 욕망이 뒤엉키는 것이 뒤늦게 흥미를 자아낸다. 오해와 배신과 음모와 갈등과 그리고 집착...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이라는 이박사의 말처럼, 욕망은 그렇게 잔인하고 추악하다. 욕망이 악인 이유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닌 욕망으로 인해 저질러지는 행위인 때문.

 

역시 여전히 남는 아쉬움은 말했듯 지우. 비의 한계일까? 오히려 진이 그로 인해 그동안 묻혀 있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오늘의 이나영은 진짜였다.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멋졌다. 멋진 배우였다. 훌륭했다.

 

오늘만 같기를. 그동안 인내하며 지켜본 보람이 생기는 것 같다. 그리 욕하고 비아냥대고 봐야 하는가... 그러나 인내는 엿같지만 그래도 열매라고 그럴싸하지 않은가. 이대로만 이어가기를. 좋다.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