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어른을 닮으면서 또한 어른과 투쟁하면서 어른이 된다. 어른을 보고 배우고, 그러면서도 어른의 기득권과 싸우고. 그래서 아이들의 세계에서 어른이란 동경의 대상이거나 혹은 극복의 대상이다.
존경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인물이거나, 그러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거나, 아니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방관자적인 존재이거나. 찰리 브라운에서는 그래서 어른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만화이기 때문이다. 아이들 세계에서 어른의 이야기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
참 한심한 어른들이다. 섣부르게 사람을 믿었다가 빚쟁이가 되어 쫓기는 매리의 아버지나, 옛사랑의 추억에 아들로 하여금 그 딸과 결혼하도록 강요하는 정인의 아버지나,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도 없이 강무결을 낳고 여전히 사랑을 쫓아 그를 방치하고 마는 철없는 어머니나,
물론 모두 스무살이 넘었다. 위매리와 강무결이 아마 24살인 듯하고, 정인이 28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어른이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을 억압하고, 그들을 옭죄고, 그들을 제한하며, 따라서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야 하는 존재들이다.
아이들이다. 정인이야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다. 상당히 디테일하다.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아버지의 따뜻함에 얼핏 보여지는 질투가. 그리고 그것이 탐욕이 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아마 모든 아들들의 공통된 욕심일 터다.
어머니를 사랑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강무결도. 그가 위매리의 "가족은 의리다. 의리를 지키겠다."라는 한 마디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또한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인 때문이다. 그의 바람을 들어주기에는 어머니는 너무 어리고 너무 나약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어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아이일 수밖에 없는 꼬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와 대등하게 맞서면서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위매리는 이 가운데 유일한 어른이라 할 수 있다. 어렵기만 한 정인의 아버지에게도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며 알까기를 가르치고, 강무결에게는 실의에 빠진 어머니를 위로할 수 있게끔 의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어른인 여성은 모성으로써 존재한다. 정인에게는 아버지에게 다가가기 위한 통로로써. 강무결에게는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는 존재로써. 오늘 두 사람이 위매리에게 이끌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어른이고, 남자에게 여성은 아무리 어려도 모성이다. 더구나 아직 덜 자란 아이인 두 사람에게는.
참 전형적이다.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 의해 알지도 못하는 그 옛사랑의 딸과 결혼해야만 하는 아들과, 사람만 좋은 무능력한 아버지의 딸로써 오랜 인연으로 그 아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와, 그리고 알고 보니 과거에 두 사람은 서로 아는 사이였더라.
원래 현재와 미래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과거란 감성의 영역이다. 현재의 우연을 설명하자면 그리고 과거로부터 개연성을 빌어 오는 수밖에 없다. 특히 순정만화에서 신데렐라적인 우연들이 개연성을 갖게 되는 가장 흔히 쓰이는 수단이 바로 과거 이야기다. 야심만만한 잘난 남자 정인이 그리 잘나지 못한 위매리와의 결혼에 목을 매고, 그녀에게 끝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득될 수밖에 없는 장치랄까?
사랑이 전부라 여기고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부모의 캐릭터라는 것도 상당히 흔한 편이다. 그런 부모 밑에서 묘하게 어른스러운 -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라는 것도.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거부한다. 그리고 딱 그런 캐릭터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 또 위매리와 같은 어른이 되어 버린 - 특히 여성일 것이다.
하긴 강무결의 어머니가 지금의 사랑에 빠져 자식을 방치했다면 정인의 아버지도 역시 옛사랑의 기억에 취해 자식을 방치하고 있다. 비어 버린 모성과 부성의 자리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누군가. 그들이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강인한 캔디형 캐릭터가 그들의 앞에 어떤 구원으로써 나타나는 것도 그래서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정형화된 어떤 구조일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맛깔나게 살리는가? 말했듯 헐리퀸을 보면 80%가 비슷한 구성이고, 순정만화도 보면 그림체마저 비슷한 만화가 책장 가득 꽂혀 있음에도 그 안에서 변별력이 생기는 이유다. 비슷한 이야기더라도 어떻게 재미있게, 보기좋게 살려내는가? 뻔하지만 뻔한 것을 알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그래서 잘 만든 만화라 하는 것이다. 잘 만든 드라마라 하는 것이다. 대사 하나하나가. 장면 하나하나가. 무엇보다 매력적인 배우들이 만들어가는 그림과도 같은 어울림들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디테일의 선들이 그러한 전형성을 특별함으로 만들고 익숙한 가운데 새로운 재미를 더한다. 비슷해도 그 어떤 캐릭터도 위매리가 아니며 강무결도 아니며 정인도 아니다. 서준도 아니다. 연기력이고 연출력이고 작품의 힘이다.
역시나 나오는 서준과 강무결의 과거 이야기. 서준과 정인의 관계. 순정만화에는 항상 라이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라이벌은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이며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 공식에마저 충실한. 과연 그녀는 악역인가? 아니면 선량한 라이벌인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이 또한 전형성일 것이다.
재미있다. 항상 말하고도 부족하다. 이건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다. 스토리야 뻔하고, 캐릭터야 전형적이더라도 말한 그러한 디테일한 살아있는 선들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다. 만화의 컷을 보는 듯한 잘 계산된 장면장면들은 보는 즐거움이 있다.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고 마음이 즐겁다.
드라마는 네러티브다. 캐릭터가 살아야 하며 관계가 탄탄해야 하며 이야기가 자연스러워야 한다. 정석적이고 충실하기에 오히려 더 새롭게 느껴지는. 좋은 드라마다. 훌륭하다.
덧, 의외로 드라마의 분위기에 한승연의 달달한 목소리가 어울린다. 이런 매력이 있었구나. 노래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드라마와 잘 어울리고 있다는 것이 좋다. 역시 캐스팅의 승리일 것이다.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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