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났다. 잠실야구장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를 위해서였다. 잔디구장 하나 없다가, 느닷없이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한다고 이제까지 없던 대형구장을 건설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빛이 바랬지만 당시 잠실야구장을 보는 야구팬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기억하는 것은 잠실야구장이 처음 문을 열고 시합을 가진 것이 고교팀이었다는 것. 아마 한일고교교류전이었을까? 당시 군산상고 다니던 에이스 조계현이 마운드에 올랐던 것이 기억난다. 팔색조라는 이름 그대로 당시에도 다채로운 구질에 싸움닭이라는 별명처럼 공격적인 피칭으로 전국구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한때 주춤했던 군산상고를 다시금 전국구 강호로 끌어올린 것이 조계현이었거니와, 하필이면 내가 본 시함에서 미친 투구를 보여주는 바람에 그 이름 석자가 각인되어 있던 터였다.
아마 82년이었을 것이다. 한국고교정기교류전에서 한국 대표로 출전했을 때, 그때 성적이 2승 1패였던가? 아마 이겼을 것이다. 그때도 조계현은 못 던지는 변화구가 없다는 호언장담 그대로 일본의 내로라하는 고교의 강자들을 침묵시켜 버렸다. 역시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이후로도 조계현이 침체해 있을 때조차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이유다. 그때 보여준 인상은 정말 대단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혹사로 프로에 와서는 과거의 이름값을 제대로 못한 케이스랄까? 일찍 노쇄하기도 했고.
아무튼 그해 벌어졌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전으로 펼쳐진 대회에서 각각 7승 1패로 동률로 1위를 달리고 있던 한국과 일본이 서로 맞붙게 되었다. 한국에서 개최된 흔치 않은 세계대회에, 더구나 우승이 걸린 중요한 시합에서, 무엇보다 상대가 일본이었다. 지금도 한일전이라면 전국이 뜨거워지는데 당시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나라에는 다 져도 일본에는 져서는 안 되었다. 하물며 그 일본과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이라니.
모두가 긴장하며 보고 있었다. 선발투수는 선동렬. 그러나 일찌감치 2점을 내주고 한국 타선은 무려 6이닝을 무안타로 묶여 있던 상태였다. 이러다 지겠구나. 그러다 터진 것이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아 보인다고 5번을 꿰찬 한대화,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8회 전설로 남은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에 이은 2사 1, 3루의 찬스에서 한대화는 경기를 마무리짓는 3점 홈런을 쏘아 올린다. 전국민이 한대화의 이름을 각인하는 순간이었다. 선발투수 선동렬은 몰라도 한대화를 몰라서는 안 되었다. 아마 한국야구사상 처음 있었던 세계대회에서의 우승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안방에서. 일본을 꺾고. 그 주역이 한대화였으니.
그 이후로 한대화의 별명은 해결사였다. 아마 처음 데뷔는 OB였을까? 당시 OB가 충청도에 연고를 두고 있었으니. 충청권에 연고구단이 필요하다고 해서 나중에 서울로 올려주마고 처음 시작을 충청권에서 했었다. 그러나 OB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해태로 와서 대폭발. 해태의 전성기에 무려 6번의 우승을 이끌며 김성한, 한대화, 이순철로 이어지던 당시 해태의 타선을 이끌었다.
OB에서도 한대화가 제대로 활약 못한 이유가 지병 때문이었다. 아마 간염이었던가? 거기에 고질적인 허리부상도 있었고. 아마 병을 항시 달고 살았지 않았나 싶다. 허리부상으로 인해 스탠스를 넓게 가져가지 못한 것이 오히려 타격자세에 도움이 되어 성적이 더 나아졌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이니. 초반에는 타격 전부분에서 상위권에 랭크되었다가 후반들면 힘이 빠지는 전형적인 용두사미형이었다. 그러면서도 꼭 중요한 때는 한 방을 때려주었으니. 앞에는 김성한이 있고, 뒤에는 이순철이 받쳐주고, 당시 해태의 타선이 보통 화려했던가?
그래서 해태팬들은 또한 당시의 한대화를 떠올리면 칠 때 쳐주는 선수로 기억할 것이다. 하긴 당시 해태라면 잔루없는 팀으로도 유명했으니까. 김성한도, 이순철도, 백인호도, 당시 해태 타선치고 찬스에 강하지 않은 타자가 없었을 정도이니. 나중에 LG로 트레이드되어서도 한 번의 우승을 거들며 맹활약했었고.
양준혁이 타석에 섰을 때 - 그러려니 했었다. 이미 예고편으로 보았거든. 예고편으로 보았기에 당연히 양준혁이 타석에 서는구나. 아니었다면 나도 이하늘의 표정이 되었겠지. 확실히 아마추어 앞에 송진우와 양준혁은 반칙이다. 그나마 이종범을 상대한 것은 은퇴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선수출신 코치 이경필이었지만.
그러나 그 양준혁에 김성수가 포볼을 내주었을 때 "뭐야?"했다. 경기가 재미있으려면, 나아가 천하무적야구단이 재미있으려면 거기서 맞더라도 제대로 승부를 했어야지. 올해, 그것도 석연찮은 이유로 갓 은퇴한 처지이기에 야구팬들의 양준혁에 대한 아쉬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어쩌면 올해 마지막 - 아니 한동안은 볼 수 없을 타석에 선 양신의 모습일 텐데 그것을 포볼로 날려버리다니.
물론 나중에 이해는 했다.
"던질 곳이 없었다."
아마 누구나 양준혁 앞에 서면 같은 기분 아니었을까? 스트라이크를 던지고 싶어도 던지지 못하는 때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으면 그게 바로 프로지. 아마추어에게 - 그것도 경력도 얼마 안 되는 선수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면 무리다.
그리고 이어진 타석,
"다음 타석이 해결사 한대화 선수입니다."
그 순간 감을 잡았다. 이거 드라마다. 대단한 드라마다.
한대화 선수도 정말 타고난 사람이다. 어떻게 꼭 만나도 이런 상황에 만날 수 있을까? 82년에도 노히트이던 상황을 깨는 안타를 친 것도 한대화였고, 끝내기 홈런을 친 것도 한대화였고, 역대 가장 많은 끝내기 점수를 낸 것이 또 한대화라고 하고.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양준혁을 앞에 세우고서도 2사 만루 끝내기 상황이라니.
여기서 감을 못 잡으면 그건 야구팬이 아니다. 아니 나는 지금은 야구팬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한때 야구를 좋아했던 입장에서, 한대화를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 순간만큼은 야구팬으로 돌아가 있었다.
반드시 친다. 한대화는 반드시 친다. 여기서 또다시 끝내기를 보여줄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해결사 한대화를 보여줄 것이다. 한대화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였다. 그리고,
깡--!
호쾌한 알미늄배트의 타격음과 함께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짧은 안타. 하지만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기에는 충분했다. 7대 7의 스코어, 7회말 마지막 공격, 그야말로 끝내기 안타였다. 클러치히터의 원조 해결사 한대화의 또 한 번의 끝내기였다.
그 짜릿함이란. 양준혁이 물론 홈런을 쳤어도 좋았을 것이다. 양준혁이 그 장면에서 올해 마지막으로 끝내기를 보여주는 것도 물론 훌륭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름아닌 한대화이기에. 다름아닌 해결사 한대화이기에. 한대화가 쳐낸 끝내기이기에. 아, 이래서 야구를 보는구나.
아마 이것은 95년 이후 프로야구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어떤 정서일 것이다. 한대화가 뛰던 시절 그 야구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더구나 82년 그 극적인 순간을 경험했던 이들이라면. 머리도 희끗해지고, 배도 나왔고, 알미늄배트가 아니면 공도 잘 안 날라가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결사 한대화라.
너무나 값진 시간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강철에 이은 김시진과 정명원과 그리고 원조소방수 권영호와, 그리고 치트키 송진우. 은퇴하고서도 여전히 130킬로가 넘는 공을 던질 것 같다. 아마추어 수준에 129킬로가 뭔 말인가? 거기에 105킬로짜리 변화구. 구석구석찌르는 코너웤. 그건 못 친다.
아, 이상군도 있었다. 공이 빠르거나 한 건 아닌데 컨트롤이 일품이던 선수였다. 빙그레 창단 초기 빈약한 자원들로 고군분투하던 때 한희민과 더불어 빙그레의 마운드를 이끌었던 에이스. 역시 공스피드는 어디로 가더라도 컨트롤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수비도 어디로 가지 않는다.
이상군이 맞춰잡는 피칭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유지훤과 김광수라는 훌륭한 수비수가 뒤에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야는 더 이상 주력이 당시와 같이 않으니 무리지만 좁은 내야라면 수십년 반복해온 수비가 딴 데로 새지는 않는다. 유중일도 그렇고, 이어 교체된 유지훤도 그렇고, 김광수도, 공필성도, 내야의 수비는 참 안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성실하게 반복해 연습해 왔는가. 그 단단하게 쌓아 올린 기초는 나이가 먹어 몸이 전같지 않아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타구를 예측하고 무너진 자세에서도 중심을 옮기고 동작을 가져가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말이다.
레전드가 왜 레전드인가. 전설이 왜 전설인가. 안타제조기 장효조가 안타를 하나도 못 쳤다. 홈런왕 김봉연의 공은 전혀 날아가지 않았다. 김일권은 발이 느려 병살을 당하고, 김시진은 아마추어들에 얻어맞고, 야구 잘한다던 박노준이 안타를 치고 달려가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그대로 뒹굴며 체면을 구기고 만다. 그래도 김성한과 김동수인데 아마추어에 삼진을 당하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순간순간 보여지는 모습들이 현역시절 그들이 그라운드를 호령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시절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모든 관객이 적이 된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프로야구원년 OB의 어린이회원이었던 이하늘과 김성수가 전설들 앞에서 설레어하던 모습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겠는가?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그라운드에 섰을 때 누구나 그들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그들의 선수로서의 모습들에. 하나라도 안타를 더 쳐주기를 바라고, 하나라도 삼진을 잡아주기를 바라고, 하나라도 멋진 수비를 보여주기를 바라고,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들의 팬이다.
성찬이었다. 너무나 과분한 성찬이었다. 비록 전성기의 화려한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 다시 선수복을 입고 그라운드에 선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해설하는 사이사이 그들의 예전 현역시절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어디 있을까? 한 순간이나마 예전 야구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는 야구소식을 듣기 위해 매일같이 포츠뉴스를 기다려 보고 했었다.
참고로 또다른 기억이지만, 장효조와 김시진, 최동원, 김재박 등은 오히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 출범에 동참하지 못했었다. 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는데 당시까지 그들은 아마추어로 남아 있었다. 바로 앞서 말한 세계야구선수권 때문에. 88년에도 송진우와 조계현, 이강철 등이 야구가 아마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던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아마추어 자격을 유지하느라 프로입단을 1년 늦추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 하겠지만 아직 권위주의정권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던 당시는 그런 게 가능했었다. 국가적인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해라.
개인적으로 이해창 선수를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데. 전성기도 거의 지난 상태에서 프로야구에 합류도 늦은 바람에 프로야구의 혜택을 크게 보지 못한 케이스였던 때문이다. 아마추어에서는 강타자에 발도 빨랐지만 알미늄배트에서 나무배트로의 적응이 어려웠던데다가 나이도 많아서. 참 좋아했던 선수였는데.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나는게, 이번 시합은 일구회가 약간의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 시합이었다. 처음에는 노인들이 나무배트를 들고 타석에 서고 있었다. 아다시피 나무배트의 반발력이 알미늄배트에 비해 상당히 약하다. 그런데 한참 젊은 천하무적야구단 팀은 알미늄배트를 쓰고. 확실히 알미늄배트로 바꿔 드니 일구회 쪽도 제법 경기가 볼만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를 경험한 사람들을 당황케 한 이하늘의 똥볼도. 강속구만 상대하다가 날아오지 않는 느린 똥볼을 보면 그것도 난감하겠지.
근래 최고의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예능이 보여줄 수 있는 - 야구를 소재로 한 예능으로써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니었을까. 시청자를 위한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나처럼 오래전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최고란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좋았다. 정말이지. 다시 없을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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