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사랑, 우주는 "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까칠부 2010. 11. 22. 06:56

원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주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있기에 우주도 있고, 내가 인지하기에 우주는 존재하며, 내가 인식함으로써 우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의 주체가 "나"일 것이니. 내가 보는 거다. 내가 듣는 거다. 내가 느끼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거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법칙이 역전되는 순간이 있다.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넘어갈 때. 그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로 듣고, 그의 몸이 되어 느끼고, 그의 머리가 되어 생각하고, 그 자신이 되어 판단하고 행동하고. 그런 것을 두고 흔히 콩깍지가 씌었다고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이제까지 오로지 나만을 중심으로 살아왔다면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그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나라고 하는 존재조차 그에게 있어 주변이 된다.

 

처음에 그리 노래하듯 외쳤다.

 

"똥오줌만 가려라!"

 

그러나 어느 순간 이경규는 말한다.

 

"똥오줌 가리는 건 포기했어요."

 

이경규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전에도 느꼈다. 1주년 특집 몰래카메라에서, 몰래카메라인줄도 모르고 동생들을 그리 신경쓰고 챙겨주던 모습에서. 단식미션이라고 생각하고 몰래 숨겨놓았던 빵을 미션이 끝나자 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모습에서. 그는 진심으로 사랑이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다.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남순이가 결정했습니다."

"남순이가 결정했고 우리 부부는 단지 결정에 따를 뿐입니다."

 

김국진도 마찬가지다.

 

"똥오줌가리는 걸 가르치려면 혼도 내고 해야 하잖아요. 저렇게 사람을 무서워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냥 내버려두려구요."

 

조금 더 성가실 뿐이다. 조금 더럽기는 하겠지.

 

"개 배설물 치우는 걸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전혀 싫거나 하지 않네?"

 

나도 그랬다. 똥이니 오줌이니 그리 질색하던 나였다. 하지만 고양이 녀석들을 키우면서 똥오줌을 치우는 것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나중에는 고양이 똥이며 오줌 냄새도 구수하게 느껴진다.

 

물론 나야 아직도 똥이며 오줌이 더럽다. 하지만 그 녀석들 똥이고 오줌이지 않은가. 그 녀석들의 똥이며 오줌을 치우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더러운 똥이고 오줌이 아니다.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 아니다. 뭐라도 대단하기를 바라는가? 그것도 아니다. 말처럼 이경규가 남순이에게 말을 하기를 바랄까?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다리에 올리는 발 하나로도 그저 행복한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게 우리집 고양이 녀석들 발이다. 그래서 책상도 좌식책상이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컴퓨터 앞에서 뭐라도 하고 있으면 녀석이 다가와 허벅지에 앞발을 턱하니 올린다. 그 쾌감이라는 것은.

 

덕구가 김국진의 다리에 앞발을 올릴 때 김국진이 느꼈던 그 감동을 나도 매일같이 느낀다. 매일 느껴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가끔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그 엄한 신호를 미처 알아채지 못하면 그때는 발톱이 찾아온다.

 

"악!"

 

분명이 고양이 발톱에 찍혀 피가 날 텐데도, 밥이 없지는 않은가? 물을 다 먹지는 않았을까? 화장실은 치웠는가? 혹시 다른 불편한 것은 없는가? 그러다가 무릎에라도 올라와 둥글게 말고 자고 있으려면 그때부터는 녀석이 지겨워 일어날 때까지 화장실이 급해도 꼼짝도 못한다.

 

그냥 좋은 것이다. 그 자체로도. 앞발을 올리고, 그래도 아쉬우니 발톱으로 찍고, 눈을 마주하고는 냥냥거리고 보채고, 또 그 무겁고 뜨거운 것이 무릎에 올라와 또라이틀고 눕고. 열심히 그렇게 길을 들인 탓에 자고 있으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내 배 위에서 자고 하는데 그것도 어찌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니 업둥이녀석은 그조차도 없이 항상 경계하는 눈빛이다. 거리를 두고 가까이만 다가가면 털을 곤두세우고 그르렁거린다. 하지만 멀뚱히 거리를 두고 가만히 앉아 나를 보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이다. 졸립거나 귀찮으면 다가가 쓰다듬어도 귀찮아 버르적거려도 피하지 않는 그게 그리 좋은 것이다. 녀석의 존재 그 자체가 행복이다. 똥이야 싸든 말든. 말이야 듣든 말든. 몸이야 할퀴든 말든.

 

덕구 녀석이 그리 달려드는 바람에 잠을 못 자 죽겠다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국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나 귀찮은가? 얼마나 성가신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먹는 것과 자는 것인데, 그 자는 것을 그리 방해받고 있으니. 하지만 그리 귀찮아하고 성가셔하면서도 덕구를 끝내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 싫다고 하면서도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이 걸려 있다. 짐승이 더 잘 안다. 자기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사람은. 덕구가 그리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이 방송용은 아니었다는 거다. 김국진의 진정이 거기에 있었다.

 

그래야 하나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다. 말 못하는 짐승이니 더 잘해주어야 한다. 말을 할 줄 알면 뭘 원하는지 들어서 해줄 수 있다. 못하지 않는가? 그러니 항상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잠시라도 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고양이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집 녀석 하나도 병원의 신세를 오래도록 진 적이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양을 포기한 김태원과 이윤석, 이정진, 윤형빈을 탓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으면 차라리 시작도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왜 유기견이 생기는가? 감당할 능력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순간의 충동에 기르겠노라 맡았다 그리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솔직할 수 있는 나이대라는 점에서 남자의 자격 이번 미션은 적절했다고 본다. 만일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나이였다면 섣부른 선택과 그리고 안타까운 후회가 반복되었겠지.

 

김태원이 깜돌이를 기르는 것은 사실 조금 어렵지 않겠나 싶었다. 이윤석이나 윤형빈에게도 태양이와 담비의 상처를 보듬을 힘은 없었다. 이정진은 이미 너무 많은 생명을 책임지고 있었고. 이경규만한 인생의 넓이와 깊이가 아직은 이정진에게는 없을 것이다. 어렵지만 현명한 선택에 또한 칭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또 그렇기 때문에 김국진의 선택은 값진 것이었다. 나이드신 어머니와 둘이서 함께 산다. 노인분이 혼자서 그 큰 개를 건사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다. 마당이 있는 주택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아파트 아닌가? 아파트에서 덕구는 너무 큰 개다. 개를 길러 본 적도 없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이기에 김국진의 선택은 이경규와 김성민과는 다른 또다른 감동이 있는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 진심이 느껴졌으니. 덕구와의 사이에 진정이 느껴졌다. 아, 이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구나.

 

덕구가 김국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잠들려 누워 있는 김국진에게 달려가 안기는 것처럼. 김국진의 품에 안겨 비로소 마음놓고 눈을 감고 잠드는 것처럼.

 

재미있기야 제제와 봉구가 재미있었다. 그냥 둘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었다. 최고의 예능감이었다고나 할까? 이번 회차의 웃음은 봉구와 제제가 전부 다 책임졌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와 사람의 교감이라는 진정성은 김국진과 덕구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내내 흐뭇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 멈출 수 없었다. 나도 그랬었거니. 나도 저랬었거니. 개와 고양이지만 얼마나 나와 닮았는가? 물론 김국진이 나보다 더 사려깊고 더 사랑도 깊었지만 그러나 그 마음이야 같지 않겠는가?

 

하긴 자기 칭찬하는 소리보다 자식 칭찬하는 소리가 더 기꺼운 부모의 마음처럼 제제 칭찬에 좋아 어쩔 줄 몰라하던 김성민의 마음이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기견"이라는 말을 혹여 제제가 들을까봐 귀를 막아주는 세심함 역시. 그 순간 김성민의 우주도 제제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그저 강아지들의 재롱에 웃어 넘기기엔 그런 작은 마음씀씀이들이 흐뭇하고 즐겁지 아니하던가.

 

여전히 이윤석과 윤형빈과 있으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지우지 못한 담비와 태양이 안타까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깜돌이와 제제, 덕구를 만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활발해진 모습이 반가우면서도 또 더욱 안타까웠고. 저리 활발한 녀석들인데. 저리 성격도 좋은 녀석들인데. 저 아이들이 저렇게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그 상처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마음의 상처를 다 치유했을 때 녀석들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울 것인가? 부디 진정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 가족을 만날 수 있었으면.

 

아무튼 한 편으로 부럽기도 했었다. 고양이를 기르면 한 가지 정말 안 좋은게, 부른다고 남순이처럼 쪼로록 달려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꼬맹이 녀석은 그게 된다. 가끔 손으로 바닥을 탁탁 치면 어디서 나타났는가 모르게 다가와서 내개 엉겨붙는다. 하지만 그것은 본능에 역행하는 것이리라. 가끔은 나도 고양이 녀석들과 그렇게 어울려 놀고, 산책도 하고 싶은데. 고양이와 한 번 놀려면 고양이의 간택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고양이가 충성심이 없는가? 태양이가 사흘동안 밥도 안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떠올랐다. 어떤 일로 잠시 녀석들을 기를 수 없어 다른 집에 맡겨놓았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꼬맹이 녀석이 무려 닷새를 물도 한 모금 안 먹고 똥도 오줌도 안 싸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집으로 다시 데려왔더니만 나를 보고서야 겨우 닷새동안 밀린 똥을 싸는 것이었다. 얼마나 똥이 굳어 있었는지 뻥 뚫려 있던 녀석의 항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도 화장실에라도 가면, 뭐라도 하려 주방에만 나가도 녀석은 쫄래쫄래 따라와 내 주위를 지킨다. 자고 있으면 항상 주위에 얼쩡이고.

 

쭈그리 녀석이야 내 무릎이 자기 침대고. 자고 있으면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은 내가 허락한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내 발을 가지고 장난감삼아 차고 깨물고 하며 놀기도 한다. 가끔은 발톱이 박혀 아플 때도 있다. 어쩌겠는가? 그저 좋다는데. 사랑은 원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지는 게 이기는 게임이기도 하고.

 

그리고 고양이와 개의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는 것은 상대를 상대를 위협할 때다. 적의를 가지거나 위협을 느꼈을 때 꼬리를 세운다. 고양이가 배를 드러내는 때는 또 자신감을 나타낼 때고. 약한 놈은 절대 배를 드러내지 않는다. 항상 보면 강한 놈이 배를 드러내고 여유가 있을 때 배를 드러낸다. 개와 고양이가 만나면 싸우는 이유가 바로 이런 습성의 차이 때문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남자의 자격 감상인지 고양이 자랑인지 모르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바로 이런 게 말 못하는 가족을 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별로 동의는 하지 않지만 반려동물이라 하는 것인지도.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진 친구. 종을 뛰어넘은 가족. 어쩌면 우주의 중심.

 

지난주와 이번주의 주제였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만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다. 사랑을 알다. 사랑을 깨닫다. 사랑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네들인 것이다. 덕구와 남순이, 제제, 고미, 깜돌이, 담비, 태양이... 그리고 우리집 쭈그리, 꼬맹이, 쭈꾸미.

 

내내 흐뭇했고, 내내 행복했고, 역시 앓아누운 후유증으로 깜빡 잠이 들었다 뒤늦게 보게 된 탓에 그것이 또 내내 안타까웠고. 다음주는 또 이성에 대한 사랑이 주제이지 않은가. 겨울은 어쩌면 사랑의 계절이 아닐까? 남자의 자격을 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웠다. 정말로. 이런 것을 두고 희열이라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