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요謠 - 좋은 가사의 조건...

까칠부 2010. 11. 26. 21:42

예전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윤형주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널리 알리려 하는데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시에도 운율이 있고 곡조가 있는데 거기데 네 알량한 곡을 붙여서 뭘 어쩌겠느냐?"

 

아마 얼마전에도 쓴 것 같은데. 운과 율에 대해서. 운이란 말하자면 라임이다. 율은 플로우다. 조는 리듬이다.

 

간단히 제사를 지내거나 할 때 축문 읽는 것을 보면 알 것이다. 불교 법회에서 불경 읽는 것도 비슷하다. 따로 멜로디가 있고 리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랩도 아니고 그냥 노래다.

 

바로 노래를 뜻하는 한자 요謠가 가리키는 것이다. 요謠란 악기 연주 없이 불려지는 노래다. 음률과는 상관없이 불려지는 노래이기도 하다. 아마 자연적인 곡조의 노래였을 것이다.

 

원래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시경에 수록된 시가들은 말 그대로 가歌, 노래들이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불려지던 노래를 따로 정리한 것들이다. 물론 곡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가사만 전해진다. 시라는 것이 단지 시로써만 읊어지게 된 것이 아주 최근의 일이건만, 곡이 남아 있지 않아도 시들은 전해져 읊어진다.

 

노래로써 전하고자 했던 것도 가사고, 노래로써 듣고자 했던 것도 가사였다. 가끔 주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멜로디 붙여서 흥얼거리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그게 요다. 최초의 노래였고 그리고 지금도 민요라는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 노래들이다. 일정한 규칙 없어 오로지 가사전달에만 충실한 노래들. 정선아라리와 같이 같은 형식 안에 가사만 바뀌어 불리워지는 노래들이 많다. 그래서 요다.

 

지금에 와서 요와 가가 서로 혼동되거나 가요 등으로 함께 쓰이는 것은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자연스런 멜로디조차도 엄정한 규칙 안에 가두어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대중음악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음악인들에 의해, 기존의 음악적 문법을 무시하고 만들어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결국은 가사. 대중음악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다.

 

다만 어떤 가사가 좋은 가사인가? 말했지 않은가? 가사 그 자체가 원래는 노래라고. 가사를 읽는 순간 멜로디가 떠올라야 한다. 리듬이 입에 붙어야 한다. 멜로디가 귀에 붙고 리듬이 입에 붙어 자연스럽게 들리고 불려져야 한다. 운율이 있고 곡조가 있고.

 

내용도 물론 중요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가사의 내용이 좋아도 곡과 맞지 않으면 그것처럼 흉물스러운 것도 없다. 귀에도 안 맞고, 입에도 안 맞는다. 물론 그런 가사는 오히려 드물다. 성공하기도 힘들고 어느 정도 훈련만 되어도 그런 가사는 아예 쓰지는 않는다. 다만 어느 정도 수준 차이는 있겠지.

 

최근의 후크송등에 대한 가사로 비롯된 비판들에 대해 내가 오히려 비판적이 되는 이유다. 그러면 과연 그런 음악들에 있어 가사를 어떻게 써야 하는데? 70년대 포크송처럼 장황하게 써볼까? 80년대나 90년대 발라드처럼 드라마틱하게 써볼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비트가 강하고 멜로디가 짧다. 그루브니 바운스니 리듬이 더 중요해지면서 비트의 비중이 높아진 결과 멜로디가 그로 인해 쪼개지게 되었다. 발라드조차도 전처럼 멜로디가 길지 않다. 가사는 짧아지고 그 안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아야 한다.

 

이를테면 한 행의 문장이 짧아지고 있다 하겠다. 한 행이 산문에서 한 문단을 이룬다 할 때 그에 해당하는 한 소절의 가사들이 갈수록 짧아지고 압축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도 짧아지게 되겠고. 그게 후크송이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런 멜로디와 리듬 안에서는 또한 운율이 있고 곡조가 있어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있지 않은가.

 

곡이 그러하면 가사도 그렇게 쓰는 것이다. 음악이 그러하면 가사도 그에 어울려야 하는 것이다. 반복된 짧은 리듬 가운데 가사만 장황하면 무엇할까? 반복된 짧은 리듬에는 그에 맞는 가사가 있다. 그에 맞는 운율이 있고 곡조가 있다. 그게 가사다. 도대체 어떻게 더 장황하게 잘 쓰라고?

 

오히려 요즘 후크송의 가사들을 보면 상당히 감탄하는 바가 있다. 물론 내용이야 없다. 빈약하다. 뭔 소리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리듬이 있다. 요즘 대중음악에서 중요한 리듬을 살리는 운율과 곡조가 있다. 훌륭하지 않은가? 가사가 곧 음악이 된다.

 

가사가 중요하다는 것이 반드시 가사에 어떤 내용이 있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가사의 내용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또 말했듯 가요가 가요라 불리우는 이유는 가와 요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가란 요와는 달리 보다 엄정한 멜로디와 리듬과 기술과 연주가 동반된 음악이다. 음악을 위한 가사도 있는 것이다. 대세가 그러하다면 인정해야겠지.

 

가사는 가사만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사가 스스로 음악을 만들어내야 비로소 요라 부른다. 가사는 음악과 함께 가는 것이다. 그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가장 좋은 가사겠지.

 

"가사가 입에 안 붙어서..."

 

아무리 좋은 가사도 그래서는 의미가 없다.

 

"가사가 귀에 안 들려서..."

 

역시 마찬가지. 많은 경우 다른 의미로 가사 때문에 메로디와 리듬이 안 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미없다.

 

평론 가운데 가사에 대한 불만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여기서 도대체 어떻게 더 잘 쓰게?"

 

먼저 곡을 보고, 그 무대를 보고, 그 분위기를 보고, 그 느낌을 보고, 어떤 음악인가? 어떤 가사인가?

 

더 이상 가사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가사더라도 더 이상 전과 같은 가사일 수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배에 줄을 긋고 칼을 찾으려 해봐야 강물은 흐른다. 시간도 흘러간다. 바뀌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다. 당연하다.

 

가사를 신경써 듣는 음악이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음악을 들으라. 가사를 듣자면. 그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