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페인트칠하고 할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 내가 저 사람들 노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가? 아마 역시 아직까지는 천하무적야구단에 깊이 몰입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멤버들의 캐릭터나 관계 등에 동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공감하지 못하는 듯.
하지만 송진우와의 연습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송진우다.
"월급날도 21일이었어요."
등번호 21번, 프로야구 현역생활 21년, 200승, 100세이브, 2000삼진, 3000이닝... 그야말로 한국야구 투수부분의 역사 그 자체를 써내려간 선수다. 어쩌면 불행할 수도 있었던 것이, 또 저 성적이 말도 안되는 혹사의 결과였거든. 몇 년이었더라? 다승에 세이브왕에... 아주 선발에 마무리에 골고루 부려먹었었다. 참 유능한 감독이지만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
아무튼 송진우의 말 한 마디에 멤버들의 볼끝이 달라지는 것이 한 눈에 보이는 게 그저 신기했다. 짧은 그냥 조언 한 마디인데 이렇게나 공이 달라질까? 물론 그것을 시합 내내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와 취미의 차이일 테지만 말이다. 의식하고 던질 수 있는 것과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던지는 것과의 차이는 무척 크다. 그것을 알아챌 수 있으니 프로일 것이다. 더구나 송진우인데.
더불어 각 투수의 장점과 약점도 흥미로웠다. 가장 굴욕이 탁재훈. 탁옹. 노화로 인해 그나마 있던 컨트롤마저 실종이라? 공은 좋은데 새가슴인 임형준이나, 변화구는 젬병인 김성수, 슬라이더 하나는 기가 막힌데 직구가 멋대로 변화해 버리는 김창렬, 체력은 후달리지만 제구력 하나는 가장 낫다는 이하늘. 만화같지 않은가? 시합만 매번 할 수 있었어도... 하긴 그러면 또 재미가 없겠지.
송진우의 공을 또 잘들 친다. 130이 아마 안 나올 것이다. 송진우 말년에 공스피트가 130 언저리에서 맴돌았던데다가 은퇴하고 아무래도 연습량이 선수시절과는 같지 않다. 더구나 겨울이다. 아마 일구회와의 시합과 마찬가지로 130 약간 못 미치는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라도 볼끝이며 컨트롤이며 변화구가 작살 아니지만. 제대로 볼배합까지 해가며 잡으려 하면 아마 거의 못 쳐냈을 것이다. 수비만 프로시절의 수비 정도가 되었어도 거의 맞춰잡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게임이니까. 예능이다. 탁재훈이 경기 도중 전화를 받는 것을 보면서도 웃어 넘길 수 있는 게 바로 예능인 때문이다. 나는 무척 열받았지만. 아무리 연습이라지만 경기장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나? 송진우 - 아니 송회장님이 진짜 마음이 넓은 거다.
어쨌거나 김현철을 상대로 장난스럽게 던진 아리랑볼이 결국 한 점을 더 내서 게임의 결과는 올드팀의 승리. 맞추기는 영팀이 더 잘 맞췄는데 아무래도 상대하는 송진우의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있었을까? 은퇴한 회장님을 다시 그라운드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사회인야구대회 출전권을 놓고 벌어진 한 바탕의 복불복은 송진우와의 연습과는 또다른 한 바탕의 멋진 예능이었다. 내가 최근 이렇게 마음 좋이며 환호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가위바위보로 올라온 일곱 팀, 그리고 그들에 의해 자기들 팀을 뽑아달라고 선택된 천하무적야구단 멤버들, 숫자판은 멀리서 좌우로 움직이고, 그 가운데 하나의 숫자를 야구공으로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각 팀의 번호 가운데 앞번호와 뒷번호 어느 것을 묶어두고 어느 것을 선택케 할 것인가? 선택권이 주어진 팀들이 어떤 번호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위바위보에서 떨어진 팀들의 표정도 가지각색으로 바뀌고, 그리고 선택된 멤버의 투구로 인해 그 결과의 희비가 엇갈린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하게 게임의 재미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 목적과, 그 결과와, 그 보상과, 그 확률. 어떤 번호를 묶고 어떤 번호를 맞추게 할 것인가? 누구더러 맞추게 할 것인가? 그리고 나머지는 천하무적야구단 멤버들의 실력과 운에 의해 결정된다. 너무 실력에만 의지해도 재미없고 너무 운에만 의지해도 허무하다. 의외성이 있어야 할 테고, 그만큼 성공의 댓가가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이 과연 그 가운데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가?
이하늘을 선택한 팀은 성공했고, 오지호를 선택한 팀은 실패했으며, 김창렬을 선택한 팀은 실패했다가 다시 다른 팀의 실패에 힘입어 성공할 수 있었다. 드라마이지 않은가? 매 순간순간마다 환호하고 긴장하며 실망하는 그 표정들이 내 표정 같았다. 어느새 몰입해 버렸다. 이거 정말 재미있구나.
최근 예능에서 시도된 게임 가운데 가장 재미있지 않았을까. 가장 긴장감 있었고, 가장 짜릿했으며,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드라마가 있고 웃음이 있었다. 멤버들이 공을 던지는 순간에는 숨마저 멈추고 있었다니까? 그래서 선택된 팀들은 정말 운이 좋다 할 밖에.
아마 그렇게 자신들의 선택과 멤버들의 플레이에 의해 떨어지고 만 팀들도 그래서 아쉬운 가운데 웃을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야구를 하니까. 정확하게 목표한 곳에 공을 던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안다. 때로는 실력과는 상관없이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음도 알고. 그게 야구다.
하일성 해설위원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던가?
"야구, 몰라요!"
떨어졌으니 실망스럽지만 그러나 그 순간이 즐거웠으니까. 무엇보다도 야구 그 자체를 좋아하니까. 야구를 좋아하니 천하무적야구단도 좋아하고, 그들과의 시합에도 저리 열성적으로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시합을 보러 올 것이라는 다짐도 허튼 것은 아니었으리라.
새삼 깨닫는다. 이 프로그램의 가치를. 예능으로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게 된 입장에서, 야구란 얼마나 즐거운 경기인가를 자꾸 되새기게 한다. 야구따위 더 이상 보지 않겠다던 나로 하여금 야구에 미쳐 살던 때를 떠올리게 하고, 그 시절의 짜릿함을 기억하게끔 한다. 야구는 정말 즐겁다. 야구는 정말 재미있는 스포츠다. 한국 야구의 전설들이 이 프로그램에 그리 호감을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정말 좋다.
아마 여기서 조금 더 이 프로그램에 빠져들게 되면 다시 야구를 보기 시작할 것 같은데, 내년 개편에서 살아남을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정말 아쉬울 것 같다. 지금 모든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 예능프로그램 가운데 폐지되면 가장 아쉬울 것 같은 예능 2위다. 1위는 당연히 남자의 자격.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나스카 레이싱처럼 천하무적야구단도 그 마니아들이 광고주를 잡아 연명케 하면 어떨까 하는 것. 천하무적야구단에 광고를 내주는 기업의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광고효과를 높여 프로그램을 존속케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든 프로그램도 천하무적야구단이 최초.
다만 안타깝다면 이렇게 재미있는가 싶다가 몇 주 전 게릴라콘서트 같은 말도 안 되는 내용도 적지 않더라는 것. 기복이 너무 심하다. 야구는 이렇게 재미있는데. 그렇다고 야구만 하면 야구만 한다고 뭐라 할 테고. 그래도 깨달아 버렸으니까. 야구는 재미있다. 야구는 즐겁다. 야구는 좋다. 천하무적야구단을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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