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매리는 외박중 - 어른의 이기심이 아이를 죽인다!

까칠부 2010. 12. 13. 23:56

사실 그다지 집중을 못했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하면 상당히 난감해지기 쉽거든. 뭐랄까 전혀 진지하거나 심각할 수 없는 드라마에서 자못 진지하고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소녀적인 달달함이냐? 아니면 서사구조냐? 결국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에는 아이가 하나 더 있다. 이안이다. 방실장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마보이. 엄마품을 벗어난 세상이 그리 험하고 무섭듯 이안에게도 방실장의 보호를 벗어난 연예계란 그리 두렵고 불안한 세계다. 이안이 그렇게 유아적인 철없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바로 방실장이 있어서. 방실장의 독기는 그런 그를 지키는 울타리다. 새끼를 지키는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마침내 강무결과 그의 어머니가 충돌했다. 어머니의 이름이 나온 것 같은데. 말했듯 집중을 못했다.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성장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사랑을 받지 못했겠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너같은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강무결이 사랑을 두려워하며 갈구하듯, 그녀가 사랑에 목을 매는 이유가 바로 그같은 상실감 때문이다.

 

"내가 재수없는 년이라서 그래!"

 

아마 그녀가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사랑한다!"

 

그리고,

 

"네가 필요해!"

 

어리석어서 그리 잘 속는 게 아니다.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의심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혹시나 거부당할까봐. 혹시나 거절당할까봐. 그녀에게 있어 유일하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것은 피가 이어져 있기에 거부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아들 강무결 뿐. 그녀에게 강무결이란 자식이면서 또한 보호자이다. 그런 강무결에게까지 거부당하려 하니 아마 지금 그녀의 상태는 패닉에 가깝지 않을까.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은 강무결에 대한 미안함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자포자기다. 차라리 강무결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지키고 싶은. 상처는 그렇게 상처를 낳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다른 상처를 만든다. 물론 드라마나 원작에서나 어머니의 과거가 묘사되고 있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유추할 뿐이다. 그 말과 행동을 통해서.

 

인정받고 싶은 아들과 여전히 아들을 품안에 거두고 싶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기에 아들이란 항상 미숙한 존재다. 아직 어리고 아직 서툴고 아직 무엇 하나 혼자서 할 수 없을 것 같고. 더구나 정인에게는 과거에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그다지 좋지 못한 기억이 있다. 자기에 대한 열등감마저 자식에게 투영하다 보니 과보호는 아이에 대한 학대로 나타난다.

 

"사랑하기에 때린다."

 

그래서 사랑의 매를 맞고 상처를 입고 평생을 그 상처를 안고 살고 심지어 그 평생이 이미 끝나버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강무결의 어머니의 상처가 그녀로 하여금 자식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었다면 - 하긴 정인의 아버지 역시 자기 아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비겁하다.

 

위매리의 아버지 역시 위매리란 자신의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다. 딸을 위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행동 속에 위매리의 입장이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위매리의 감정이라든가 위매리의 바람이라든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일방적이다. 그 역시 위매리를 진지하게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지 않다.

 

그가 바라는 것은 딸 위매리의 행복이 아니다. 위매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아예 위매리를 보지 못하게 자기 앞을 가리고 있는 아내와 딸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상처를 그를 통해 치유하고 싶은 것이다. 자기가 믿는 행복을 통해. 자기가 믿고 있는 행복을 딸에게 강요함으로써.

 

"내 말대로만 하면 매리는 분명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그에 비하면 방실장은 오히려 솔직하다 할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이안이란 역시 수단에 불과하겠지. 자기의 명성을 높이고, 자기의 존재를 높이고, 또한 이익을 얻기 위한. 그리고 그를 위해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하는 정당성마저 있다. 이안의 존재로 그녀의 모든 행동은 정당성을 얻는다. 아마 그래서 그녀가 이안을 볼 때면 가장 진실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기는 드라마에서만 그럴까?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부모들이 그렇다. 그 부모들의 상처는 그들의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상처를 자식을 통해 치유하고자 다시 자식들에 상처를 입힌다. 자식이란 없이, 자식을 제대로 똑바로 보려 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의 상처에 대해서만. 자기의 컴플렉스와 트라우마에 대해서만. 자식은 부모의 대신이다. 자식은 부모의 다른 자신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증명하고 싶어한다. 나는 나다. 그 간단한 말을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증명받고 싶어한다. 인간의 욕구 가운데 어쩌면 가장 강한 자존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다. 자기를 스스로 인정받지 못하고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전히 부모의 일부로써만, 그 그림자로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이 상처가 되고 마침내 때로 아이를 죽이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

 

어찌 보면 참 슬픈 드라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연 슬프기만 한가는, 그러나 이런 것이 또 하나의 코드니까. 어떤 감정을 부여하기에는 이미 일상화된 클리셰다. 이런 부모가 있고, 이런 아이들이 있고, 그렇기에 이런 관계를 이루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원래 창작이란 상처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상처가 크고 깊을 때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의 경우는 그보다는 상당히 기술적으로 기존의 코드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창작이라기보다는 생산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차이가 있다. 잘 만들었지만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기존의 코드들을 적절히 잘 이용했다.

 

그것이 어쩌면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더 깊이 이입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철저히 구경꾼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이유일 테고, 느닷없는 서사적 상황에 어색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테고. 캐릭터물과 서사물은 그 보는 관점부터 다르니까. 이입하지 못하는 서사구조란 재미없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너무나 뻔한 위기상황. 그리고 그린 듯 예측가능한 반응들. 그리고 전형적인 대사와 캐릭터. 하지만 그 짜임새를 담보하는 사람들 사이의 감정의 선들이. 순정만화의 강점일 테지만. 내가 순정만화를 더 좋아했던 이유가 그런 감정의 흐름 때문이었다. 어쩌면 공식화된. 그것을 알기에 그래도 납득하고 볼 수 있다. 그다지 기대도 긴장도 되지 않지만 여전히 기다려 보는 이유일 것이다. 계속해 보고 싶다.

 

아무튼 문근영의 캐릭터와 연기는 진짜다. 단 한 순간, 문근영의 눈을 보고 있으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공허하지만 그러나 빛이 느껴지는 눈동자는. 전혀 솔직하지 못하게 솔직하기만 한 표정들은. 그 묘한 경계가 그녀에게서는 느껴진다. 시청율이 정말 아까울 정도다. 이번회 얻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장근석과 김재욱, 김효진은 물론 조연들의 연기도 상당하기는 하지만. 역시 타이틀롤일까?

 

강무결과 만나고, 서준을 만나러 갔다 혼자 터덜거리며 돌아오고, 그리고 정인을 만나고... 사실 그렇게 크게 대단할 것은 없는데도 주인공다운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쩌면 극의 흐름에서 비껴나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라는. 감탄하게 된다. 그녀가 바로 주인공이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래 만족을 바라고 보기 시작한 드라마는 아니었다. 매리는 외박중에 내가 기대한 것이 있다면 그 기대에 대해서는 충실하지 않았을까. 만화를 기대했고 만화 캐릭터를 기대했다. 배우의 매력이 더해지고 드라마의 현실성이 더해진 만화를. 충분하지 않은가. 시청율이야 어떻든.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