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타진요 사태를 돌아보며 - 인터넷문화의 한계...

까칠부 2010. 12. 29. 13:18

솔직히 타진요로 인해 나도 피해가 있었다. 그래도 5천 명은 넘게 꾸준히 들어오던 블로그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3천 명 남짓. 역시나 타진요 건으로 네티즌을 욕했더니만 그렇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시 타진요 사태는 순전히 네티즌이 자초한 것이었으니. 네티즌을 욕하지 않고 어찌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한 것, 과연 당시 파워블로거네 논객이네 하던 사람들이 몰라서 타진요와 왓비컴즈에 낚였던 것일까? 그래도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기도 한 사람들이 전혀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타진요와 왓비컴즈의 그 말도 안 되는 낚에 낚여 파닥거린 것이었을까?

 

일단 당시 타블로를 비난함으로써 그들은 네티즌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다. 최소한 타진요를 비판하더라도 타블로를 함께 비난함으로써 네티즌의 공격으로부터 피해갈 수 있었다. 당연히 당시 타블로를 비난하던 이른바 파워블로거 가운데 그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심어린 사과도 없었고, 뼈아픈 반성도 없었고, 그러나 그들은 여전하다. 나는 회복하는데 몇 달 걸렸다.

 

결국은 생각하는 것. 어쩌면 알면서도 낚여준 것이 아닌가. 블로그도 장사니까. 일단 사람 많이 들어오고 추천수 높고 하면 요즘은 수입도 된다. 확실히 당시도 타블로 욕하는 쪽이 추천도 많이 받았다. 사람도 많이 모였고. 포털에도 기사가 노출되며 인지도를 쌓았고.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도 생각한다. 결국에 타진요 사태의 핵심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네티즌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파워블로거네 논객이네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네티즌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네티즌을 바보라 생각하느냐?"

"몇 만의 타진요 회워니 바보라서 그런다 생각하느냐?"

 

저 논리도 아닌 논리가 통할 수 있었던 이유다.

 

네티즌이란 옳다. 정의롭다. 오류가 없다. 이건 차라리 신앙이다. 그래서 믿어 버린다. 같은 네티즌이기에. 그것은 마치 한국인이기에 한국인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같다. 한국인을 비판하는 너도 한국인이다.

 

그래서 네티즌이 하는 말이면 거의 무비판적으로, 단지 네티즌이 하는 말이라는 이유로 그것이 논거가 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여론으로 만들고. 자신도 네티즌이라는 생각에 여론에 발맞추어 생각하다 보니 결국에 그리 휩쓸려 오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도된 오판이랄까? 하필 평소 가장 정의롭고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논리적이던 네티즌들이 더욱 휩쓸린 것이 그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정의로우니까. 마찬가지로 그들이 속한 인터넷과 네티즌이란 항상 옳으니까.

 

사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말했잖은가? 당시 제대로 사과하고 반성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누군가는 떡밥을 만들고 네티즌은 그에 낚여 파닥거린다. 논객이니 파워블로거나 결국은 그런 떡밥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미끼일 뿐.

 

이를테면 인터넷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원시적인 정서적 공동체라는 것일 테고.

 

"대중의 정서가 그러니까..."

 

법도 원리도 원칙도 이치도 논리도 없이 대중이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히는 네티즌이 그렇게 여긴다. 그것이 비난의 근거가 되고, 그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고, 인터넷이 그를 응징할 명분이 된다. 지금도 그렇게 쓰인다. 여러 사안에서,

 

"대중이 보기에 그것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논리야 어쨌든 대중이 기분이 안 좋으니까..."

 

이걸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원래 파시즘이란 믿음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 무오류에 대한 믿음이었고 너무나 당연한 당위였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우리이기에 옳고, 내가 그렇게 여기기에 정당하다. 그게 모이면 파시즘이 된다. 파시즘은 원시적인 향촌공동체의 "우리"와 맞닿는다. 한 사람의 이탈도 용납 못하는.

 

과연 타진요만이었는가? 타진요의 떡밥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네티즌부터,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타블로를 비난하고 조롱하던 네티즌부터, 공공연히 외국인에 대한, 연예인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던 네티즌에서부터, 과연 그들은 별개인가? 단지 타진요와 왓비컴즈에게만 모든 책임이 있는가?

 

그래서 네티즌을 비판했던 것이었고, 그 가운데 개티즌을 욕했던 것이었다. 그것이 또 네티즌의 기분을 거슬렀고. 아직도 그때의 앙금이 적잖이 남아 있다. 이제 겨우 예전 수준으로 회복한 모양이다.

 

말하지만 이성이란 의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다. 나와 우리, 그리고 모두. 의심하는 나를 먼저 의심하는데에서 이성은 시작하고, 논리와 합리가 나온다. 나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이기 때문에, 그래서 믿어버리는 것을 맹목이라 부른다. 맹목은 어리석음이며 재앙이다.

 

하기는 이런다고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있기나 할까? 참 끊이지도 않는다. 별 시답잖은 일들로 누군가는 떡밥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어느새 여론이 되어 사실로 확정되고. 세 사람만 모여도 호랑이가 된다는데 인터넷은 그 몇 만 배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돌이켜 볼수록 참 어이없는 사건이었지만, 그러나 겪어 볼수록 납득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항상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이란. 인터넷 여론이란. 인터넷상의 대중이란. 그 어리석음은.

 

1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더욱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 것은 그래서다. 내년에도 여전히 발전은 없을 것이기에. 내년은 또 누구를, 무엇을 먹이로 삼아 미쳐 날뛸까? 내가 특정한 몇몇 블로거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읽지 않는 것 이름만 보고도 패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걸 무척 싫어한다. 혐오한다.

 

어쨌거나 과연 타블로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무책임한 네티즌이라는 것들은 당장에라도 훌훌 털고 일어서라 하는데, 원래 때린 놈은 맞은 사람 사정 이해 못한다. 실컷 때려놓고는,

 

"아프냐? 나도 아프다."

"어서 일어나 전처럼 사이좋게 지내자."

 

죽여버릴까?

 

만 명의 관중도 두렵지 않다던 그가 100명 앞에 나서는 것조차 겁난다고 했을 때. 대중을 신뢰하지 못하는 대중아티스트는 설 자리가 사라진다. 먼저 그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대중. 최후의 승자는 결국 왓비컴즈랄까? 왓비컴즈의 뜻대로 타블로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으니. 그 역시 네티즌 책임.

 

하기는 그러겠지.

 

"나는 아냐!"

"남들이 그런 거야!"

"일부일 뿐이야!"

"왜 나한테 그래?"

 

그 일부를 방치한 것도 나머지의 책임이라는 것. 일부가 일부일 뿐일 때 일부는 항상 계속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도 그러고 있고.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생각이 많다. 그나마 그동안 겪어온 것이 있기에 냉정할 수 있었고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 "우리", "모두", 항상 의심하고 경계해야 할 단어들. 우리가 있고 모두가 있는 인터넷이기에 더욱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여전한 모습들을 보면서 더욱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모두"를 파괴하는 독이다.

 

가해자는 발뻗고 자고, 피해자는 여전히 공포에 떨고, 얼마전 학교폭력으로 인해 오히려 피해학생의 부자가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는데. 준비되지 않은 책임지지 않는 힘과 폭력이 갖는 공포에 대해서. 그리고 집단 속에 책임도 염치도 도의도 잃어버린 대중들에 대해서도.

 

과연 내년에는 조금은 나아질까? 그랬을 거면 최진실 때 조금은 반성하는 게 있었겠지. 타블로로 조금은 돌아보는 게 있어야 했을 테고. 별로 기대는 않지만. 그나마 실망조차 없었다는 건 다행일까? 절망은 실망에서 나오니.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다만 희망도 없다.

 

정리해 보니 결국 이 사건이 남는다. 올해 가장 인상깊었던 사건이라. 한국인과 한국의 대중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고. 인터넷과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도. 한숨만 깊다. 생각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