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젠틀맨, 예禮 그리고 악樂...

까칠부 2011. 1. 2. 18:58

공자가 인을 이야기하고 군자를 말하면서 항상 강조한 것이 예와 악이었다. 예절과 음악.

 

예란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다. 자기를 다스리고 관계를 다스린다. 화가 난다.

 

"야 이 자식아!"

 

싸움이 벌어진다.

 

"저기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한 번은 더 듣게 된다.

 

부부 사이에도,

 

"야! 너!"

 

그리고,

 

"여보, 잠시 앉아서 나와 이야기 좀 합시다."

 

여기에 차 한 잔을 곁들이면 어떨까? 와인을 꺼내 작게 안주라도 만들어서 마주앉아 마시며 대화를 시도한다.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행동은 정중하게, 다정다감하게 예의를 잊지 않고 항상 대한다. 어떨까?

 

물론 자기도 화가 나겠지. 억울하기도 하고 분통도 터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자신을 다스리며 상대에 대한 존중과 존경을 잊지 않는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상대의 입장을 들으려 노력한다. 그를 위한 형식이 바로 예일 것이다. 말을 높이고, 행동을 낮추고, 격식을 갖추고, 그리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감정은 사그라들고 이성이 고개를 내밀게 된다. 보다 냉철하고 엄밀한 이성이 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만든다.

 

자신만이 아닌 상대도 마찬가지다. 웃는 얼굴에는 침을 뱉을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낮추고 예를 다해서 다가오는데 침을 뱉을 수 있는 사람이란 드물다. 그렇게 상대도 객관적으로 이성적이 되고 비로소 대화로써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감정은 사그라들고 이성으로써 어느새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자기를 다스리고, 그리고 상대를 다스리고, 그리하여 상황을 다스릴 수 있고. 굳이 직접 힘을 쓰지 않더라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가 의도하는 바대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 아니 의도한다는 자체도 없이 순리를 따라 흐르도록 하는 것. 그런 것을 지혜라 하는 것일 게다. 달리 인격이라고도 한다. 위엄이라고도 하고, 품위라고도 하며, 고상하다, 우아하다, 품격있다, 결국은 인간으로서 완성되었다. 인간으로써 아름답다. 군자다. 달리는 신사.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

 

이런 것이 예라면 순수예술이란 바로 그런 감정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대중예술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내쏜다. 사랑하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리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순수예술은 - 그보다는 고전예술은 그것을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하는 것이 있었다.

 

원래 예술이란 자체가 조금 형편이 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일반 대중이 즐기던 대중문화와는 별개로, 어느 정도 경제력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체면도 있고, 교양도 갖춘, 지적이고 도덕적이었던 어떤 엄숙함을 위해 존재하던 것이었다.

 

하긴 그게 교양이었다. 예와 악. 군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인이며, 덕이며, 오늘 말한 젠틀맨이며.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는 감정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천박하게 여기는 것. 한 걸음 물러나 관조할 줄 알고, 두 걸음 물러나 다스릴 줄 알며, 어느 순간에도 자기를 흩뜨리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보다 그를 위한 적지않은 시간과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만큼 자신을 투자할 수 있어야 갖출 수 있는 자격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단지 식탐만을 위해 음식을 취하지 않는다. 먹고 싶은 욕심이 있어도 하나씩 단계를 밟아 격식을 지켜가며. 프랑스요리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식을 먹는 예의라는 것이 있었다. 흔히는 밥상예절이라 부르는 것이다. 천박하지 않게. 보기 흉하지 않게. 우아하게. 품위있게. 항상 노력하면서. 주의하면서.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배가 고프다는 욕망을. 먹고 싶다는 탐욕을. 자유롭고 싶고 편하고 싶은 그 자연스러운 본능조차도. 그러나 그조차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하고 객관화하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예. 그 정신을 이루는 것이 악. 그림과 음악, 공연, 예술들... 자기를 객관화하여 볼 수 있도록, 개인적인 감정마저 보편화시켜 한 걸음 떨어져 관조할 수 있도록. 이성으로써. 감성의 극은 지극히 냉철한 이성이다.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의 희노애락을.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관계를. 예술가들은 대단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이해하려면 당연히 그 시대의 예술을 이해해야 한다. 예술을 이해하다 보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도 있다. 악을 안다는 것은 그러한 감정의 다스림과 승화를 안다는 것이며, 예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연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슬퍼하기보다는 아름답게, 절망하고 좌절하더라도 그것을 아파하기보다는 장엄하고 웅장하게. 그 자체에 침잠하고 매몰되기보다는 그것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의 세계로 승화해 내보낸다. 자신의 내면을 객관화시키고 보편화시켜서. 다스림이다. 나로부터 비롯된 감정이지만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모두가 공감할 수 있게 멋지게 구체화하여. 그런 것들이 겉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이 품이 되고 격이 되고 예가 되는 것이다.

 

예만 알면 딱딱하고 악만을 알면 방종하다. 악으로써 내실을 채우고, 예로써 겉을 마무리한다. 그것이 군자고, 그것이 마로 교양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 말하는 젠틀맨. 신사다.

 

왜 교양일까? 왜 그런 거추장스러운 것이 필요한가? 허세스럽고 불편한 것들이 어째서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인데. 나이를 먹고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또는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직장상사가 되고, 어른이 되고, 그렇게 자신의 지위를 쌓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에 대한 다스림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귀족들이 그렇게 엄격하게 예의를 따졌던 것이 그래서였다. 오히려 조선시대 양반들은 상민들만큼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림을 배우고 글씨를 익히고 악기를 다루고 음악을 즐기고. 항상 자신을 삼가고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격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지위에 맞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 예의를 지키고, 예술을 즐기고.

 

그래서 항상 예술가의 가장 큰 후원자는 양반이고 귀족이고 부르주아였다. 오늘 나온 샤갈이니 베토벤이니 차이코프스키니, 그들의 예술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을 후원하던 그들 유한한 상류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요리에서의 예절 역시. 그것은 그들의 자기를 확인하고 완성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신분 높은 자신들의 책임이며 당위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리 해야 한다고. 귀족이기에. 양반이기에. 남들보다 위에 있기에. 더 뛰어나고 훌륭하기에.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함부로 하인을 때리고, 평민에게 욕설을 퍼붓고, 양반이 백정이라고 앞에서 조롱하고 비아냥거리고 했다면 그 순간 양반사회에서 퇴출된다. 여성에게 예의를 다하는 것이 남존여비시대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닌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가 존중하려 한 것은 여성에게 예의를 다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그것이 멋이었다. 그들의 미학이었다.

 

젊어서야 질풍노도로 자기 감정에 충실하더라도 나이를 먹어서는 슬슬 자기를 다스리고 관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귀족이나 선비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를 높이고 존중하는 법을 알아갈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높이는 동시에 쌓여가는 시간과 관계를 원만히 다스리는 기술이기도 하다. 프랑스요리를 나누며 나누는 대화가 소줏잔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와는 다른 것처럼. 항상 그럴수는 없어도 그렇게 자기를 다스림으로써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스려나가는 것도 나이를 먹어가며 갖추어야 할 모습일 것이다.

 

신해철도 아마 그런 의도로 그런 말을 했었을 것이다. 나이 40이 넘어가면 자기만의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자기 감정에 충실한 대중문화만이 아닌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고급예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뜰 수 있어야. 그게 또 공자가 말하는 불혹이라는 것이겠지. 그에 비하면 지금 기성세대의 문화라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미션이었다 생각한다. 그래도 한 번은 귀족도 되어 보고 선비도 되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존경할 수 있는, 존경받을만한 자신을 가꾸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보다 멋지게. 누구보다 폼나게. 살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지나온 시간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지금 자신에 당당하게. 자기 자신에 충실하게. 조금은 허세스럽더라도. 나이를 먹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런 얼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이 삶도 사회도 풍요롭게 만든다.

 

다만 아쉽다면 그렇다기에는 예능이라는 자체가 대중문화이지 않았는가.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향유하는 철저히 대중에 봉사하는 대중문화의 첨단에 있는데, 과연 스스로 다스리고 관조하는 예와 악에 어울리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결국은 다큐멘터리.

 

아니 하긴 다큐멘터리가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림이 있고 음악이 있고 춤이 있다. 샤갈과 이응노와 차이코프스키와 베토벤이 있다. 그나마 이경규는 상관없다. 그는 철저한 광대다. 그러나 광대가 못되는 다른 누군가였다면? 누군가가 있어 오버하며 장난스럽게 억지로 웃음을 만들려 했다면? 그런 점에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아쉽다는 건 김성민의 존재. 워낙에 밋밋하기만 한 미션에 이경규가 광내노릇을 자처하며 이경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초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김성민이 있었다면 조금은 분위기가 달라졌을까?

 

어쨌거나 주제가 그랬으니까. 미션 자체가 그러하다 보니. 섣부른 웃음보다는 단지 샤갈에 대해 이해하고 이응로에 대해 감탄하던 순수한 모습이 더 좋았다. 공연에 집중하고, 때로 졸기도 하고, 감탄도 하고, 처음 보는 클래식 공연에 어디서 박수를 칠 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겨우 아는 멜로디가 나왔을 때 반가워하던 모습들이라거나. 문득 터져나오는 감탄사들도.

 

솔직히 한참을 웃었다. 클래식 공연의 분위기에 익숙지 못한 촌스런 세 남자들의 모습에, 그다지 말도 없고 웃음도 없지만 이윤석, 이정진, 윤형빈의 그런 허술한 모습들이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달까. 공감대에서 나오는 그런 친근한 웃음이야 말로 남자의 자격만의 매력이라. 저들은 나와 같다.

 

그냥 웃고 떠들고 계산된 멘트 속에 모든 것이 능숙하기만 했다면 주제는 의미가 없었겠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테니까. 역시나 익숙하지 않은 어색한 나 자신의 모습들일 테니까.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아 묻고 또 묻고 실수하던 그런 그 모습들이.

 

모르면 모르는대로, 어색하면 어색한대로, 익숙지 않으면 익숙지 않은대로, 그러나 함부로 웃음을 만들려는 경솔함이나 무례함은 없다. 존중하고 존경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졸린 것마저 참아가며 끝까지 들어주는 것도 역시 다스림 아니겠는가. 예일 것이다. 악일 것이고.

 

공자는 또 말했지. 인은 인하고자 함으로써 인이다. 예나 악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진지함이 있을 때 이미 자격을 갖추는 것과 같다. 설렁탕을 먹으면서 샤갈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들처럼. 졸다가도 어느샌가 감탄사를 연발하는 그런 모습들처럼. 그래서 그들은 젠틀맨이다.

 

웃음기는 없었지만 어쩐지 집중해서 보게 되는 회차였다. 나도 그림을 좋아하고 공연을 좋아해서. 클래식도 좋고 발레도 좋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인간 자체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지만.

 

그나저나 오늘 유독 눈이 갔던 것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인데 (윤석이형은) 유부남, (형빈이는) 유부남 예비, 나는 뭐야?"

 

이정진에게도 캐릭터가 생길까? 김성민이 있을 때는 총각 둘이었지만 이제는 유일한 솔로다. 돌싱 김국진을 제외하면. 무언가 그림이 그려진달까? 비덩에 싱글. 살려볼 수 있으면.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예술인은 예술인이다. 그리 모든 것이 삐딱한데 그림을 대하면서, 그리고 발레를 보면서, 그 자세가 무척 진지하다. 껄렁껄렁 대충 보는 것 같지만 동작 하나 말 한 마디에서 예술가에 대한 존경이 묻어난다. 천연덕스레 스파게티를 얻어먹는 모습과 오페라글래스로 발레를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에 어떤 괴리가 있을까. 그래서 내가 인간 김태원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겠지만.

 

웃음은 없었다. 말하지만 오늘 남자의 자격에서 웃음은 사라졌다. 대신 어느샌가 흐뭇하게 짓는 미소가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 자신도 격이 높아진 듯한 뿌듯함도. 조금 언 더 여유롭게 살아야지. 예禮를 알고 다시 예藝를 알고. 삶이 풍족할 수 있을 때.

 

남자의 자격다운 미션이었다 생각한다. 신년에 어울리는 미션이었고. 다만 예능으로서는 어땠을까.

 

그러나 나 자신이 만족하면 그만이니까. 재미있었다. 의미도 있었고. 신년이 그래서 즐겁다. 좋다.

 

 

덧, 가만히 써놓은 것을 읽고 있자니 왜 이 블로그가 인기없는가 알겠다. 누가 예능 보고 이런 식으로 쓰던가? 넘친다. 확실히. 그렇다고 다른 식으로 쓰는 건 내 방식이 아니고.

 

역시 하나 얻어걸린 셈이다. 그래도 난 이렇게 쓰련다. 글은 솔직한 게 좋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