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예술을 대하는 자세...

까칠부 2011. 1. 2. 23:52

예술작품을 대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략 세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작가에게 붙이는가. 다른 하나는 자신에 붙이는가. 그도 아니면 그 사이 어디엔가 있는가.

 

전자는 대개 팬문화에서 나타난다. 어떤 음악인가보다 누가 부르는가. 어떻게 들리는가보다 어떤 의도로 불렀는가. 작가에 대한 존경과 경애에 자신을 맞춰간다. 때로 그것은 권위에 눌리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어떤 아티스트가 만든 작품이니 무조건 좋다.

 

반면 후자는 아마 대부분의 대중일 것이다. 어떤 의도인가보다 어떻게 들리는가. 어떤 배경이었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 당장에 나를 기준으로 해서만 보고 듣고 판단한다. 더 이상은 필요치도 않고 아예 생각하려고도 않는다. 내가 보고 듣기에 좋은가 나쁜가.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는 비평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작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그리고 청자의 입장도 충분히 배려하면서, 그러나 작가의 권위에 눌리거나 수용자의 입장에만 일방적으로 천착하는 법 없이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보다 일반화하여 볼 줄 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유리된 보편성과 객관성. 감성과 이성이 교차하는 지점일 것이다.

 

클래식이 바로 그렇다. 클래식은 상당히 일반화된 음악이다. 당장 비틀스만 해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작가와 관련된 이야기가 공개되어 있는가. 또한 그에 대한 수많은 감상들이 일반화되어 떠돌아다닌다. 이미 비틀스의 음악이란 정형화되어 있다. 그래서 클래식을 두고 누군가는 고정음악이라고 한다.

 

즉 일반적인 대중음악이 작가에 의해, 혹은 대중에 의해 그들의 의도와 의지에 의해 폭넓은 이해를 갖는다면, 고전음악은 이미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어떤 인식과 이해에 의해 그 폭이 매우 좁다.

 

한 마디로,

 

"그게 베토벤이야?"

 

베토벤이라는 이미지가 이미 고정되어 있는데 거기에 새로 해석을 더하자면 얼마나 더할 수 있을까. 멋대로 음을 바꾸고 악기구성을 바꿔서 새로운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만화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아니면 클래식이기를 포기하거나. 같은 베토벤이더라도 그렇게 변화가 심한 것은 더 이상 클래식이 아니다.

 

그래서 클래식이 어렵다는 소리가 나온다. 들리는대로만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거든. 단지 작가의 의도에 대해서만 접근해서도 안 된다. 그 사이 어느 지점. 작가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더라도 그 작품을 통해 쌓여 온 의식과 시간들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음악이 나오게 된 배경이라든가 이전과 이후의 음악들과의 연계라든가 어떤 그런 구조적인 내용들에 대해서까지 이해할 수 있으면 좋다.

 

즉 클래식은 공부하면 할수록 듣기 좋은 음악이다. 엄격해야 하고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 훈련도 필요하고 노력도 필요하다. 어차피 음악을 듣는 것은 자신이다. 다만 얼마나 그 음악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가. 부단한 연마가 필요한 것이다.

 

하긴 클래식만일까. 대중음악도 제대로 즐기자면 그만한 철차탁마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그렇게까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대중음악의 원래 뜻이다. 그에 비하면 클래식이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까. 이미 일반화되고 보편화된 그 가치를 향유하는 것이다. 노력이 필요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샤갈이 대체 어떤 사람인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배경에서 그림이 그려졌는가. 미술사적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관계라든가, 동시대의 다른 작가와의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에 대해서라든가, 그리고 그런 노력 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에 대해서.

 

그게 바로 교양이라는 거다. 그저 흔한 유행가를 듣더라도 그것을 자기로부터 유리시켜 객관화하고 일반화하여 즐길 수 있는 것. 보다 노력하여 더 높은 수준에서 음악을 듣고 즐길 수 있는 것.

 

물론 지금은 교양의 시대가 아니다. 보다 일반화되고 대중화된 문화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엄격함이나 엄밀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솔직한 감성을 요구한다. 작가는 솔직하게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그것을 대중은 그대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사이의 관계도 매우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다. 굳이 더 노력할 것도 없고, 굳이 더 고민할 것도 없고.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전문적인 음악평론이 대중적으로 널리 소비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아예 없는 것만 해도 그렇다. 오히려 자기의 감상을 방해하는 듯한 비평이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더욱 클래식이란 멀 수밖에. 세계적으로도 갈수록 클래식 시장은 작아져만가고 있다. 시대가 그렇다.

 

다만 그럼에도 그런 예술에 대한 경건함 만큼은 배워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도 많이 요즘 게을러졌지만, 그것을 만든 작가나, 그 배경이나, 참여한 인원들이나, 그 의미들에 대해서도. 작가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집착하지 않고, 보다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그 순수한 외경에 대해서도.

 

물론 역시 예술이란 순수한 외경이며 감탄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외경이며 놀라움에 대한 감탄이다. 그런 순수한 감성을 배제하자는 게 아니다. 거기에 조금 더 더한다면.

 

느닷없이 진중권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디 워라든가. 아이돌 음악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나 그에 대한 또다른 반응들이라든가. 좋은 건 좋은 건데 그 이상에 대해서는 어떨까. 단지 듣기에 좋다 이전의 보다 근본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갖는 전문가들 또한.

 

확실히 대중은 갈수록 게을러진다. 미디어가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추세다. 그러나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가 되었을 때 쯤. 하나의 즐거움으로.

 

식사예절도 그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온전히 나는 젓가락이 더 편하다. 하지만 프렌치의 식탁예절이 요구하는 바를 쫓아보는 것도 한 즐거움일 것이다. 더불어 그 배경지식에 대해 알아간다면. 그 또안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부분일 테니 말이다. 설렁탕도 좋지만 그것도 좋지 않을까. 잠시 자기를 버리고.

 

왜 차이코프스키였을까? 왜 베토벤이었을까? 왜 프렌치였을까? 왜 샤갈이고 이응노였을까? 생각해 보는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해벽두. 의미있는 시간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한다.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