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 참정권이 의미하는 한 가지는, 바로 정치인으로 하여금 그 표를 위해 정책을 구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 표를 미끼로 한 번 유권자의 마음을 끌어보라. 신념? 오로지 권력에 대한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비전이 있어서 공약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경쟁자를 누르고 마지막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진정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공약이 만들어진다.
더러운가? 하지만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만 천문학적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 선거에 쓰이고, 선거에서 이기면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권력이 손에 들어온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렇게 말랑한 생각 가지고 정치란 하는 게 아니다. 국회의원까지는 정당의 힘으로 어떻게 가능하겠지만 - 하긴 정당 안에서 공천을 받고 지원을 받으려 해도 그만한 정치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유권자 앞에 표를 달라고 나설 수 있다. 그게 정치다.
정치인은 권력을 탐한다. 권력이 주는 꿈과 달콤함을 탐한다. 그리고 유권자에게는 그들에게 권력을 줄 수 있는 훌륭한 카드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쓸 것인가. 현명한 유권자라면 자기를 위한 공약을 고심하고 궁리하도록 그 표로써 후보자를 내몰고 이끈다. 그리고 어리석은 유권자라면 막연히 정치인의 선의에 기대어 표를 주겠지.
"그 분이 다 해 주실 거야."
그 치열함이 마음에 든다. 이상이 있다. 자기가 꿈꾸는 정치가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을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맡긴다. 그러나 후보자는 현실을 선택한다. 이상과 현실. 추구하는 바와 그러나 지금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한 모순과 괴리. 충돌하고, 갈등하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리더란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정책이야 어떻게든. 정책 같은 건 아무렇게든 주위에서 참모진이 열심히 머리 굴리면 나온다. 비무장지대를 세계환경유산으로 지정하겠다는 공약 역시. 그 전에도 무상의료에 대한 공약이 있었다. 누군가는 동의하고 누군가는 반대하며 그러나 결국에 받아들이는 것. 장일준이라는 꿈을 보았으니까. 어떻게 해도 장일준을 통해 대신해 꿈을 꾸는 것이다. 그 꿈을 보여주는 것.
하필 케네디가 나왔다. 케네디도 마찬가지다. 사실 케네디가 세운 업적이란 그렇게 대단하다 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그는 미국인에게 꿈을 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며 혼란스럽기만 하던 시기,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앞으로 어떤 나라에서 살 것인가 하는 비전을 제시해주었다. 그의 사소한 정책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레이건이 지금 높이 평가받는 이유도 그래서다.
나야 싫어하지만 박정희가 어째서 아직까지 국민들에게 평가가 높은가. 박정희가 쿠데타를 처음 일으켰을 때 해외에 거주하던 한국인 기자가 찾아와 그를 인터뷰했다. 물론 그는 민주주의를 불법으로 뒤엎은 쿠데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윤보선과 박정희를 동시에 인터뷰한 뒤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윤보선에게는 없었던 것, 장면에게도 없었던 것, 그에게서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잘 살아보세!"
"하면 된다!"
전쟁의 폐허 속에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인들에게 비로소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었다. 독재를 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지만, 지금도 그 여파가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가 보여준 비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직까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2년 노무현 바람이 불었던 것도, 2007년 현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지지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대중의 반응도,
"우리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진정으로 대다수 대중이 바라는 바. 나머지는 길이 정해지면 그에 따라 충실히 걸어가면 그만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사람이라면 믿어볼 수 있다. 그런 것을 카리스마라 하고 다른 말로 리더십이라 한다. 그에게 모든 판단을 맡겨도 좋다는 믿음.
대통령 영부인과 결탁해서 정보를 빼돌리고, 심지어 해킹을 통해 청와대의 자료를 훔치고, 그런 불법과 패악이 저질러지는 가운데서도 그를 믿어볼 수 있겠다는 것. 하긴 장일준만도 아니다. 김경모도 마찬가지다. 신사처럼 점잖은 이미지 뒤에 숨은 냉철한 전략가로서의 모습은 그도 정치인임을 보여준다. 단순히 사람이 좋기만 해서 그런 자리에까지 오를 수 없음을 - 그처럼 측근들에 신뢰를 얻을 수 없음을 잊은 탓에 결국 장일준은 한 방 맞고 말았다.
맞다. 또한 리더십이란 승리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지금은 옳지 못하다. 옳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때는 내가 바라는 바를 그를 통해 이룰 수 있다. 권력이든. 아니면 어떤 이상이든. 지향이든. 그런 믿음일 것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좋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입에 발린 말이 없어서 좋다. 정의라고 하는, 선과 윤리라고 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잠꼬대같은 소리가 없어서 좋다. 치졸할 정도로 치열한 머리싸움과 승리를 위한 계산과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의지가 있어서 좋다. 이런 게 정치다. 바로 이런 게 현실정치다.
멋지다. 거기서 장일준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며 헛짓거리 했으면 채널 돌아갈 뻔 했는데. 정모와 유민기가 주먹다짐 한 번으로 형제가 되는 장면에서 김이 팍 새버리고 말았거든. 원작에 나오는 장면인가? 원작자가 상당히 마초적인 인물이라. 아마 학생운동세대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런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흔한 정서는 아니고 너무 전개가 급해서. 시간을 두고 전개해갔어도 좋았을 것을 너무 빠르다.
넥타이 하나, 단어 하나, 단어 사이의 간격에 대해서, 표정의 변화라든가, 후보자 한 사람만이 아니다. 연설문을 써주는 전문가가 있고,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챙겨주는 또 전문가가 따로 있다. 그런 하나하나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선봉이 있고, 좌군이 있고, 우군이 있고, 치중이 있고, 정찰병이 있고, 유격군이 있고, 참모가 있고, 뜬구름잡는 소리는 박을섭같은 정치인에게 맡기는 것이고 현실정치에서는 그런 하나하나까지 전술이고 전략이고 계산에 의한다.
다만 역시 거슬리는 것은 장일준의 아내 조소희. 이런 타입이 꼭 사고 크게 친다. 대통령의 영부인이 대통령 모르게 수작을 부리듯 - 하긴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가 영부인과 그 일가친척들 때문이었다고. 그런 식으로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서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에만 집착하는 모습이란. 그래서 거리를 두어야 할 때와 아닌 때를 판단하지 못하고. 전략적인 비전 없이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쫓으며 임기응변에만 의존하려는 모습은 오히려 박을섭에 더 가깝다. 일부러일까? 그런 조소희를 장일준과 짝을 이루게 한 것은.
안타깝다면 같은 시간대 경쟁작들이 막강하다. 싸인. 그리고 마이 프린세스. 본방이었다면 프레지던트 하나만 보고 말았을 것을 일 때문에 결국 나중에 다시 다 보느라. 문득 눈에 띈 1화라는 부분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되었다. 결국 다 보고서 고민 중. 무얼 볼까. 정말 마음에 드는데.
어쩐지 예상이 되지만 그러나 그래서 기대가 되는. 어떤 식으로 어떻게 치열하게, 그러나 진흙탕에서 더러워지고 상처입어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줄까. 이것이 바로 정치다. 바로 이런 것이 현실정치다.
재미있다. 최수종과 홍요섭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정한용, 양희경, 그리고 의외의 제이. 항상 보면서 감탄한다. 목소리까지 좋아서. 지켜보는 보람을 느낀다. 오늘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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