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석은 차라리 아이와 같다. 한창 배신자를 어르고 있는데 형 만석이 도끼를 던져 죽여버리자 종석은 마치 앙탈하듯 형에게 소리친다.
"그렇게 말도 없이 그러지 말라니까!"
배달온 초밥을 먹으며 값비싼 옷에 묻은 피를 투덜거리는 모습은 철없는 아이의 칭얼거림과 닮아 있다.
하기는 그 형인 만석이 도끼를 던져 단번에 배신자를 죽여버린 것도 초밥이 배달왔기에 그것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따.
차태식에게 잡혀 고문당하는 상황에서도 죽은 아이들에 대한 속죄보다는 죽은 아이들이 갖는 금전적 가치에 대해 항변하는 종석. 그리고 종석이 잡혀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애원하기보다는 잡혀 있던 소미에 대한 살의부터 내비치는 만석.
시조일관 무표정하게 경찰이 들이쳐 사람들이 잡혀가는 와중에도 만화방 카운터에서 라면을 먹고 있던 노파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오명석은 차라리 사소해 보일 정도다. 정말이지 그린 것 같은 악당인다. 악의로 똘똘 뭉친 그는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악의란 어쩌면 악의조차 없는 것이다. 종석의 어린아이같은 모습 어디에 악의가 있던가. 만석의 모습에서도. 심지어 장기를 드러내는 의사의 모습에서도. 아이들을 개미로 사들여 부리는 노파이 모습에서도.
악이란 그렇게 순수한 것이다. 어린아이같은 종석의 천진함이나, 만석의 어디로 주체하지 못하는 충동, 그리고 노파가 먹는 라면에서 보이는 본능적 욕망. 그리고 끝까지 종석과 만석이 지키고자 했던 돈.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일상적인 것들에서 그토록 잔인하고 끔찍한 악이 악의조차 없이 나타난다.
악의란 없다. 단지 악의 없이 천진했을 뿐이고, 충동에 못 이겼을 뿐이고,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고, 단지 돈을 추구했을 뿐이다. 사람의 목숨마저 돈으로 계량할 정도로. 전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나쁜짓을 한다는 작은 악의조차 없이. 그렇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에 맞서는 차태식 역시 선이니 정의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간을 말하고 윤리를 말하기에는 그의 손은 너무 가볍다. 너무나 쉽게 사람을 치고, 너무나 쉽게 사람을 죽인다. 대신 그를 움직이는 것은 악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소미에 대한 집착이다.
그는 아내와 태어나지 못한 아이를 지키지 못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소미를 가엾게 여기며 그러나 남자로서의 본능으로 소미를 지키고 싶어한다. 그에게 소미란 지키지 못한 아이와 아내 대신이다. 그가 진심으로 분노하는 것은 마치 새끼를 빼앗긴 어미의 심리와 같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다. 지켜야 할 것이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소미의 눈이라 여겼던 그것을 놓치 못하는 것처럼.
종석이 필로폰을 만드는 소굴에서 아이들을 발견했을 때 그가 분노한 것도 그래서다. 수컷은 새끼를 지켜야 한다. 아비는 자식을 지켜야 한다. 지아비는 아내를 지켜야 한다. 남자란 지켜야 하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에 대해서는 당연히 분노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법과 윤리를 뛰어 넘는 인간으로서의 당위다. 아마 그래서 제목이 아저씨인 듯.
옆집 아저씨. 전혀 상관없지만 수컷이다. 사내이며 아버지이며 남편이다. 그러나 그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가 완성된 것은 소미를 구하면서부터. 소미의 죽음을 확신하고 죽음을 선택하려던 차태식은 그렇게 소미의 생존소식에 목숨마저 구원받는다.
인간은 악해서 악한가. 인간은 선해서 선한가. 그보다는 악이란 자체가 없는 것 아닌가. 만석이나 종석 역시 누구 하나 악하지 않았으니. 차태식도 선하지 않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명확하게 악과 선은 드러난다. 지키고자 하는 자와 탐욕하는 자. 그래서도 아저씨다. 종석이나 만석은 결국 아이들이니까. 아저씨란 어른이겠지. 어른이란 누군가를 지키는 존재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아저씨마저 싫어하게 되면 더 이상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악의없이 소미에게 상처입히던 어느 아이의 어머니도 같은 예일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는 더없이 선하지만 그렇지 못한 소미에게는 누구보다 잔인하다. 그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 단지 소미를 외면하는 것으로 소미에게 상처를 주었던 차태식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를 미워할 수 없다는 소미의 말은 인간이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으로 선해지고 무엇으로 악해지는가.
그래서 말하지. 사람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라고. 선한 가운데도 악해질 수 있고, 정의로운 가운데서도 악을 저지를 수 있다. 그것이 순수할수록. 의심할 수 없이 순수한 것일수록. 아니 의심조차 않거나.
악에 취한다.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악에 취해버리는 나를 본다. 그렇게 영화속의 악은 매혹적이다. 지분거리는 이야기가 없다. 어떻게 해서 악당이 되었거니. 악이란 무엇이거니. 자신의 잘못을 최소한 인정하기나 할까? 여전히 자기들은 잘못이 없다. 왜 그러는가? 나는 틀리지 않았다. 옳다. 죄를 반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말이다. 누가 반성하고 누가 후회하는가? 그를 태연히 죽이는 차태식만큼이나.
아마 그낼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악을 잘 형상화하지 않았을까. 의도한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그리 된 것일까? 단지 내가 그렇게 보았을 뿐인 것일까? 그렇다기엔 그 악의란 너무나 매혹적이거든. 악의조차 없이 악을 저지르는 그 순수함이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그를 응징하는 가감없는 폭력마저도. 그 잔인함마저.
한 번 보고 돌이켜 떠오르는 것이 그것이다. 원빈의 비주얼이 얼추 지워지고 나니 남는 찌꺼기 같은 것. 라면 먹을 때도 가라앉은 건더기가 그리 맛있지. 아마 그런 느낌? 머릿속을 떠오른다. 그것들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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