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선생님이 어느날 우리들에게 물었다.
"너희들 사람들 웃기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뭔지 아니?"
그리고서는 보여주신 것이 교단 위를 걸어가다가 순간 넘어지는 모습이었다.
"하하하하!"
아이들에게서 웃음이 터져나왔을 때 선생님을 비로소 말씀하셨다.
"바로 이게 웃음이다."
아마 사회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성악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가. 그에 대한 선생님의 답이었다.
"그냥 멀쩡히 걸어가면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그러나 길가다 사람이 넘어진다면, 그것도 대단해 보이는 사람이 그런다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사람을 웃기는 건 다른 사람의 나약함과 불행이다."
물론 웃음에는 그런 웃음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지금은 안다. 웃음은 인간이 갖는 감정 가운데 가장 복합적인 것이다. 우습기는 한데 그것에 왜 우스운가는 한 마디로 단정짓기 힘들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는 그런 짓궂음이 - 정확히는 악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임산부가 얼음판에 미끄러 넘어졌어도 안타까워하기 전에 먼저 웃음부터 터뜨리고 마는.
급조한 미션이었다. 아예 대놓고 급조하고 있었다. 시상식을 앞두고 당장 정형돈과 길이 부상을 당해 미션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는데 스튜디오도 없어 토크도 못하고 어떻게 하는가.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마침내 박명수의 말이 힌트가 되어 결정된 "정준하가 쏜다! 쏜다! 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정준하는 모자란 형이었고, 나머지는 그를 속이려드는 못된 동생들이었다. 뻔히 정준하 자신도 아이디어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그러나 세 사람이 모이면 호랑이도 한 마리 만든다고 작당하고 덤벼드는데는 도리가 없다. 말했듯 정준하는 모자란 형이다.
"도대체 5년 동안 어떻게 바보가 되어 살았대?"
너무나 바보 같아 항상 동생들에게 샌드백이 되어주는. 레슬링에서도 그랬지만 무한도전에서 정준하처럼 멤버들의 플레이를 잘 받아주는 멤버도 없다. 비유하자면 아주 빵빵 소리가 잘 터지는 치는 맛이 있는 샌드백이라 할 것이다. 어떤 분량에서도 그래서 멤버들은 정준하를 공격함으로써 확실하게 자기 분량을 챙길 수 있다. 시청자 역시 공범자로서 그 야릇한 가학적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 미션도 마찬가지였다. 정준하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뜩지 않아 하면서도 어느샌가 설득당해 게임에 동의하고 마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 많은 사람들은 정준하가 곤란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네 여섯 멤버가 쓴 비용을 지불하는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울그락푸르락 코평수가 넓어지고 말이 이어지지 않고, 얼마나 통쾌하고 재미있을까.
그것이 첫째 기대였다. 얼마나 돈을 쓸 것이고, 또 그때 정준하는 얼마나 난처한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첫번째 게임장소였던 MBC 지하매점에서 정준하가 멤버들이 구입한 상품들의 가격을 맞추는 것으로 일단 한 번 저지됨으로써 더욱 고조되고 말았다. 정준하가 돈을 내지 않게 되었으니 실망해야 했지만, 그러나 정준하가 예상한 금액과 실제 계산되는 금액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과연 정준하는 실제 그 비용을 맞춰 지불에서 면제될 수 있을 것인가?
돈을 내기를 바란다. 돈을 내면서 곤란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란다. 난처해하는 표정을 보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편으로 정준하는 과연 저 비용을 맞춰서 지불로부터 면제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기대이지만 전자의 기대가 더 크기에 패널티로서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정준하의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아주 짓궂은 악의가 정준하를 대상으로 그렇게 프로그램에 대한 집중을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정준하의 계산능력. 마지막 놀라움과 감탄이 이로부터 이어진다.
처음에는 악의로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그 악의적인 쾌락을 방해하는 요소에 대한 긴장으로 고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남다른 정준하의 계산능력. 편의점은 그렇다 치더라도 회전초밥집에서, 그리고 전집에서, 전집에서도 정준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거의 정확하게 가격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쯤 오면 악의적인 기대든 뭐든 다 사라진다. 정말 이 사람 대단하구나. 거의 진기명기수준?
거의 정준하 한 사람이 살린 회차였다고 할 수 있다. 정준하였기에 가능한 미션이었고, 정준하였기에 흥미와 기대도 고조되었고, 그리고 정준하였기에 마지막에는 감탄하며 웃으며 끝낼 수 있었던. 무한도전스러운 짓궂은 어수선함에 스타킹을 능가하는 정준하의 진기명기. 더불어 마지막 반전이 되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타겟이던 정준하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된 노홍철. 악의어린 짓궂은 웃음은 순수한 감탄으로 바뀌고 이내 속이 후련한 유쾌함으로 바뀌어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확실히 예능이란 돈과 시간을 들여서만 웃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획과 장기간의 촬역과 막대한 제작비와 놀라운 세트와 화려한 출연진... 그보다는 이런 시답잖은 소소한 미션으로도 얼마나 사람들을 제대로 웃길 수 있는가. 정준하가 있고, 유재석이 있고, 박명수가 있고, 정형돈이 있고, 하하가 있고, 노홍철이 있기에. 정준하가 돈을 쓴다는 자체만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것이 바로 농익은 버라이어티의 힘이겠지만. 오히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었기에 멤버들은 더욱 그동안의 농익인 캐릭터와 관계로써, 역할로써 즐거운 웃음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닌가.
의미로 본다면 역시 "나비효과 특집"이겠지만 재미로 본다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 가운데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이야기들. 하나의 주제가 던져지고 출연자들은 자연스런 역할극을 통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한 편의 꽁트처럼. 한 편의 시트콤처럼. 마치 짜 맞춘 듯이.
아무튼 쉴 새 없이 웃다 끝났다. 뱃가죽이 당기고 눈물은 글썽하고. 초밥집에서 시시각각 바뀌던 정준하의 표정이나 - 원래 모두가 목적하던 바였다 - 혼자 초밥집에서 독박쓰고 허탈해하는 노홍철, 뻔한 골판지 박스로 만든 길과 정형돈의 탱크까지. 박명수야 항상 정체된 물꼬를 터주는 역할이고. 갑자기 초밥이 먹고 싶어지네. 전도. 전은 혼자 해먹기가 참 애매한 음식인데. 그렇다고 사먹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아마 올해 이런 소품을 많이 하려는 모양이다. 리얼버라이어티는 크게 할 때보다 작게 할 때 더 의미있고 재미가 있다.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그 작지만 소중한 웃음들이. 그를 위한 캐릭터이고 관계이고 그동안 쌓아온 시간 아니겠는가. 무한도전의 힘을 느꼈다. 신년벽두, 최고였다.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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