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희가 갈수록 걱정이다.
"가족은 건드리지 말랬지? 용서하지 않겠어!"
차라리 부정하고 부패한 것은 낫다. 아니 사람이 부정하고 부패한 이유란 게 다른 게 아니다. 대개는 가족이다. 주위. 친인척.
한 자리 더 챙겨주려고. 하나라도 더 안겨주려고. 자기가 해먹는 것 그렇게 많지 않다. 아니 자기가 해먹으면서도 생각한다.
"이 모든 건 가족을 위한 거야..."
혹은 아내이던가, 혹은 자식이던가, 부모형제던가,
그래서 결국 자식이, 혹은 아내가, 처가가 하고 다니는 것을 방치한 결과가 지난 정권들에서 말년을 장식했던 권력형 비리였다. 김대중조차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방치되다시피 함께 고초를 겪었던 아들들과 측근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말년에 그런 오명을 뒤집어썼었다.
"우리 가족을 함부로 말하지 마!"
물론 그럼에도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대한 의지는 그녀로 하여금 아버지를 포기하게끔 하지만.
바로 그게 권력이다. 부모자식도 없이 밟고 올라서는 것.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였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와 형 방간을 몰아냈으며, 방석과 방번의 이복형제들을 죽였다. 권력 앞에는 가족도 없다. 친구도 없다. 있다면 동지 뿐. 같은 정치적 이해와 목적을 공유하는 존재로써. 가족도 그럴 때 의미가 있다.
이미 장일준을 용납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한 김경모의 입장은 단호하다. 자기도 모르게 - 이 역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 아내와 측근들이 금품수수한 사실에 대해서도 나는 결백하니 장일준과 대일그룹을 끝장내겠다고 달려드는 무모함이란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인가를 알게 한다. 그래서 또 떠오르는 사람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다행이라면 그보다는 상당히 영리하다는 것. 대통령이 뒤에서 야료를 놓은 것을 눈치챘다. 대가 약하다기보다는 단지 생각이 많은 것. 그러나 생각이 많은 가운데서도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다만 장일준이 그보다 더 생각이 많고 더 과감했던 것이 패인이었던 셈.
대일그룹을 버릴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동안의 장일준의 캐릭터라면 분명 그랬을 터이니까. 그래서 김경모 찾아가서 무릎 꿇을 때는 저 자식 왜 저러나? 그러나 대일그룹을 버리고 장인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그는 대통령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김경모와 치킨게임을 벌일 경우 당에 미칠 문제들에 대해 정권재창출을 노리는 대통령의 입장을 이용해서. 김경모를 통해 정권을 재창출하고 싶기에 어쩔 수 없이 장일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김경모는 투사다. 혁명가다. 혹은 행정가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다. 정치란 싸움이다. 그것도 사람의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는 싸움이다. 나와 너, 내 편과 네 편, 나의 이익과 너의 이익, 나의 손해와 너의 손해, 서로간의 관계를 조율하고 이해관계를 설정하고. 무엇을 주고 대신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오히려 총칼 없이 오로지 관계로써만 이루어지는 전쟁이기에 그것은 더 치열하다. 김경모는 강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강하기 때문에 정치에는 맞지 않는다. 미국이 외교를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국도 원래 외교를 못했다. 너무 강해서.
외교란 약자의 전유물이다. 약자가 강자가 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가 되는 것이다. 강자조차 스스로 약자가 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것이 외교다. 강하려고만 하면 외교란 성립하지 않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사람 사이에서 단지 강하고자 한다면 정치란 성립할 수 없다. 김경모가 올곧고 강하면서도 영민하기까지 하지만 정치가로서 장일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다.
드라마는 그것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김경모는 내내 강하다. 그리고 정의롭다. 수싸움에도 능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장일준의 수에 말리고 말았다. 어떻게? 그것이야 말로 장차 프롤로그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경모가 장일준에게 경선에서 패하는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나마 곁에 백찬기라는 타고난 정치꾼이 있기는 하지만 참모란 보좌하는 것이지 스스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보스의 기질이 그것을 받쳐주지 못하는 한 참모의 역할이란 한계가 있다.
진짜 제대로 현실정치를 보는 듯한 긴박감이. 그런 큰 스캔들에도, 그리고 눈물까지 쏟으며 큰 절을 하고 기자회견을 해도, 그러나 결국 경선을 결정지은 것은 대통령의 조직표였다. 대일그룹의 비리도, 대일그룹의 사위라는 현실도, 장인을 구속케 한 그 비정함에도,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하는 비장함조차도, 그러나 결국 선거를 결정짓는 것은 조직표다. 우리나라의 현실 아닌가. 아무리 이슈가 터지고 그로 인해 그 후보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도 흔들림없이 굳건한 조직표가 선거를 결정한다. 심지어 후보자가 없이 - 한 한 번도 선거운동조차 한 적이 없었음에도 당선되었을 정도로.
대일그룹의 비리를 이용한 김경모의 공격, 그에 대한 김경모의 아내와 측근들에 공여한 금품에 대한 폭로의 반격, 그럼에도 굽힘없이 대일그룹의 탈세까지 끄집어내어 공격해 들어가고, 서로 파멸로 향한 치킨레이스에서 장인의 결단과 장일준의 선택에 의한 반전,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싶은 순간 대통령과의 협상에 따른 결과의 반전은 가슴이 후련하도록 통쾌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정치로구나. 정치드라마로구나.
유민기와 장인영의 로맨스도 점입가경을 이룬다.
"인영이는 내가 가슴으로 낳은 딸이야. 자네는 내 아들이고. 절대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는 없어!"
아무리 양녀라도 사람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게 있는데. 장일준의 다른 아이들과 남매로 자란 장인영이 어머니와 다르다고 유민기와 이어지는 것을 부모된 입장에서 용납할 수 있을까? 그만큼 장인영에 대한 마음이 깊다는 것이겠지. 조소희의 장인영에 태도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진심으로 딸이라 여기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반응들이다. 사랑받고 자랐구나 싶으면서도 이거 꽤 재미있게 꼬이겠구나. 그리고 내일은 또 장인영의 어머니가 장일준 앞에 장애물로 나타날 테니.
아무튼 정말 대박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지금 3사의 수목드라마는 격전지다. "마이 프린세스""싸인" 두 드라마 모두 평균 이상의 퀄리티를 자랑하며 순항 중이다. 보니까 실제 재미있기도 했다. "프레지던트"도 두 드라마에 결코 못하지 않은 - 오히려 훨씬 더 나은 완성도와 재미를 자랑하는 드라마지만 워낙에 "대물"이라는 정치드라마가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더구나 판타지를 자극할마한 것이 거의 없다. 국민을 말하지도 않고, 민족을 말하지도 않고, 서민을 말하지도 않는다. 비열하고 야비하고 때로 저열하기까지 하지. 타이밍도 좋지 못하고 경쟁상대도 좋지 못하고...
그래서 이것 하나만 보기로 했다. "싸인"도 뒤가 궁금하고 "마이 프린세스"도 어떻게 되는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원래 주간드라마란 일주일에 하루, 혹은 이틀 그때마다 시간 맞춰 챙겨보는 재미니까. 오로지 그 드라마여야 한다. 그 드라마가 아니면 안 된다. 나중에 다운로드받아가며 다른 드라마도 모두 다. 그래서야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만한 재미와 의미가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정말 멋있는 드라마다. "멋"이라는 그 자체를 보여주는 드라마라 하겠다. 남자란. 그리고 권력이란. 그야말로 남자의 드라마랄까? 항상 보고 나면 뿌듯함을 느낀다. 이건 최고다.
최수종과 홍요섭의 연기는 정말 말이 필요없을 정도다. 정한용의 능글맞음도. 캐릭터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비밀을 간직한 듯 유민기를 바라보는 하희라의 증오어린 표정 역시 오싹오싹했다. 스토리도 좋고, 숨 쉬는 것마저 잊게 만드는 연출도 좋고, 그보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좋고.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나저나 역시 가장 통쾌했던 장면은 장일준 캠프를 출입하는 어느 여기자에 대한 오재희의 통렬한 일갈,
"어디 나이도 어린게 기자라고 함부로 맞먹으려 들어?"
금연건물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고도 그것을 지적하는 데 대해 오히려 뻔뻔하게 대드는 기자에 대해 오재희는 전혀 사양없이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는다.
"내가 어떻게 네 선배야?"
의원 사모님이었어서 뻣댄다고? 당연하게 정치인과 그 보좌관들은 언론인인 자신을 대접해야 한다는 듯이. 적당히 말을 놓으며 군림하려 들고.
하기는 메이저 언론이라 했다. 영향력이 크겠지. 정치인 입장에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괜히 언론과 시시비비를 가리다 망한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이제는 아예 언론이 권력까지 만들 수 있다. 언론은 이미 권력이 되어 버렸다. 권력을 비판해야 할 언론이. 고작해야 출입기자마저도.
"특정 언론은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그때도 그랬었지. 그래서 그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서 승리했다. 하지만 그의 동지들조차 언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없었더라는 현실이라는 것이. 언론은 괴물이 되어 더 이상 언론이 언론이 아니게 되었다.
"나도 기자쪽은 취미가 없어서요..."
그에 대한 질타가 아니었을까? 언론같지 않은 언론에 대한. 언론이 비판해야 할 대상인 부패한 권력을 닮아가는 그 모습들에 대한. 정말 같지도 않은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기사들과.
정말 가슴이 다 뻥 뚫리는 것 같앗다. 모니터를 한 대 탁 치고 싶을 정도로 후련하고 시원했다. 쩌릿쩌릿. 바로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이 드라마를 보게 만드는 것이리라. 카타르시스? 어떤 답답함조차도 끝내는 이런 시원함으로 승화된다. 정말 속에 있는 것까지 다 쏟아낸 듯한 그런 통쾌함들이.
중독된다. 정말 중독된 듯하다. 벌써 내일이 기다려진다. 훌륭하다. 최고의 정치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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