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시크릿가든 - 리셋, 데우스 엑스 마키나...

까칠부 2011. 1. 10. 06:50

이런 게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아무런 논리적 구조나 장치 없이 느닷없이 마법 하나로 끝. 하기는 마법으로 시작했으니 마법으로 끝나야겠지. 사고로 뇌사상태가 되었다더니만 죽은 길라임의 아버지 길주원의 마법으로 모든 것이 리셋.

 

아마 "매리는 외박중"에서도 말했을 것이다. 사고란 곧 리셋이다. 부활이다. 정신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어디론가 멀리 떠난다는 것 역시 이곳에서의 인연이 끝남을 뜻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부활. 그로부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항상 사람들은 말하지.

 

"차라리 게임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얽히고 섥힌 이야기를 한 번에 요약해 정리할 때 그래서 곧잘 쓰이는 관용적인 기법이다. 아마 작가가 로맨스물 좀 보았던 모양이다. "매리는 외박중"이나 "시크릿 가든"에서처럼 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는 것도 있고, 앞서 말한 외국이나 멀리 떠나서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이제까지의 구조가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파괴되고 나면 다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이야기의 구조를 쌓아가야 한다. 대개는 그때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지. 김주원이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기억상실 역시 곧잘 쓰이는 클리셰 가운데 하나다.

 

"내가 가르쳐줄께. 처음부터 하나하나...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을 했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내게 당신이, 당신에게 내가 어떤 의미였는지..."

 

기억상실에서 깨어나보니 이번에는 거꾸로 상대가 의식불명이 되었다더라는 어떤 소설의 마지막 대사다. 길라임을 보면서 문득 그 대사가 떠올랐다. 하나하나 관계를 다시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압축요약되고, 그 과정에서 꼬이고 꼬인 이야기들도 점차 정리되어 해결된다. 원래 게임에서도 리셋을 선택하는 이유가 이제까지의 플레이를 다시 정리해 보기 위해서 아닌가.

 

사실 그다지 꼬인 스토리도 아니지만. 하긴 길라임이 너무 주눅들어 있었다. 비굴하고 비루했다. 김주원에 대해서도, 김주원의 어머니 문분홍에 대해서도 누구에게도 당당하지 못했다. 당당하지 못한 채 움츠리고 자꾸 숨으려고만 했었다. 철저히 김주원에 의해서만. 그런 상태에서 과연 이야기는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겠는가. 스토리의 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이야기가 유치해진다. 단지 남자 잘 만나서 팔자 고쳤다는 스토리는 20세기가 되기도 전에 이미 끝났다. 길라임이 당당히 김주원을 마주하고 문분홍 여사와 맞서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역시 리셋이.

 

그를 위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제까지 모호하던 것이 길라임의 감정이 김주원의 기억상실로 더욱 명확해지고 분명해졌다. 그와 함께 그로 인한 간절함이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구원 뿐이다. 그녀는 강해졌으며 스스로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하필 그 계기를 부여한 것도 죽은 길라임의 아버지. 아버지란 가부장적인 신일 테지.

 

설마 거기서 김주원을 기억상실로 만들어버릴 줄이야. 하지만 진부하지만 과감한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결말도 분명해졌다. 이야기가 다시 리셋됨으로써 길라임에게도 김주원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부여되었으며 그로 인해 갈등을 해소할 단초가 만들어졌다. 김주원의 기억이 2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는 자체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의 회귀다. 모든 것이 시작된 때. 김주원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가 시작된 시점이다. 치유를 위해서라도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지만 옳다.

 

아쉽다면 역시 짐작대로 윤슬과 오스카의 사랑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구나. 김비서와 임아영의 사랑이야기도. 물론 임아영이 조역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유인나는 영웅호걸 이래 내가 예뻐라 하는 배우 가운데 하나다. 조금 더 분량이 있었으면 했는데. 김사랑도 무척 드라마속의 모습이 예뻐서 더 보고 싶었다. 특유의 증오와 그리움을 오가는 그 아슬아슬한 감정의 선을. 썩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몹시 어울렸다. 썬의 이야기가 너무 허술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김주원과 길라임이니까. 더구나 이렇게 리셋까지 되고 나면 이제부터는 둘만의 이야기로 내달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없다. 원래 글도 다시 쓰기 시작하면 훨씬 짧고 빠르다. 게임도 다시 플레이하면 몇 배 더 빠르게 엔딩을 볼 수 있다. 아쉬움은 있지만 이제는 준비해야겠지.

 

재미있었을까? 약간은 피식거린 게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가. 하지만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까지도 동의하고 보는 드라마일 테니까. 너무나 뻔하지만 매력적인 구조였고 구성이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여전히 하지원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윤상현도. 그건 별개로. 만족한 시간이기는 했달까. 일단은 괜찮았다.

 

확실한 것은 더 이상 피동적인 신데렐라를 사람들은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택되는 사랑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사랑이다. 캔디는 스스로 선택하여 테리우스와 사랑했고 알버트와 결혼했다. 길라임이 다시 리셋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정석이다. 진부하지만 확실하다. 좋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