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자의 자격에서 인생을 보았다. 누가 마라톤을 고독한 운동이라 했던가?
김국진이 가장 선두를 달릴 때 그의 옆에는 그와 페이스를 맞춰 달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윤형빈이 그 뒤에서 힘들어 할 때도 그의 곁에도 그와 함께 달리며 페이스를 맞춰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정진이 예전 입은 무릎연골 부상으로 힘들어 할 때도 천천히 쉬엄쉬엄 뛰어가라 조언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김성민도...
윤형빈이 마침내 김국진을 추월했을 때 그에 기꺼이 환호와 격려를 보내던 김국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지쳐서 쉬엄쉬엄 걸어오던 김성민을 마침내 이정진이 따라잡아 만났을 때 또 얼마나 정겨웠던가? 초코파이를 나눠먹고 그리고 다시 마지막 스퍼트...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사람들...
가장 감동은 이경규와 이윤석이었다. 포기하려 할 때 이경규는 이윤석의 존재를 알고 망설였다. 김태원 이전 국민약골이라 불리우던 이윤석이 아직 포기하지 않고 달린다는 것을 듣고 이경규는 마침내 다시 달리기로 결심했다.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고 보이지조차 않았지만 그의 곁에는 이미 이윤석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윤석에게도 역시 한참 더 나이가 많으면서도 뛰는 이경규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내가, 자신이...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이거라도 끝까지 해야지..."
그리고 또한 그들을 마지막까지 뛸 수 있게 한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을 끝내 보지 못하고 멈추라, 그만두라 말하던 제작진이었을 것이다. 언제든 멈추어도 좋다, 언제든 그만두어도 좋다, 언제든 포기해도 좋다,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 더 마음이 놓이는 말이 어디 있을까?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실제 그렇다. 힘들어 좌절하고 싶을 때 좌절할 수 있다 말해주면 마지막 힘을 낼 용기를 얻게 된다. 포기해도 된다고, 그만두어도 된다고,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마음이 놓인다. 든든해진다. 그래 여기서 조금만 더... 한 걸음 더 내딛을 힘이 거기에서 나온다. 외롭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마지막 한 번 쥐어짤 힘이 생겨난다.
인간은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고독한 레이스라던 마라톤조차도 이렇게 정겹고 따뜻할 수 있다. 얼마든지 더 빨리 더 먼저 치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조차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곁을 지켜주고, 함께 달려주고, 응원해주고 기뻐해주고... 도중에 이경규를 스쳐지나간 서로 끈으로 묶고 달리던 시각장애인 마라토너처럼. 그렇게 우리도 마음의 끈을 묶고.
김태원의 포기 또한 그래서 우리의 삶을 닮아 있다. 할 수 없으면 포기해도 좋다. 할 수 없는데 억지로 매달린다고 현명한 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고, 만일 더 못할 것 같으면 그대로 포기해도 좋다. 그가 아니더라도 아직 여섯 명의 다른 남자들이 있었으니. 지켜보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할 수 없다면 멈추고 대신해 달리는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보아주면 좋지 않을까?
"내 친구지만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자랑스러워해 주어도 좋지 않을까?
김태원은 누구보다도 힘겨운 긴 레이스를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락밴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80년대 함께 출발한 락밴드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두 번의 구속과 한 번의 정신병원, 1집과 2집, 3집의 성공 뒤에는 GAME과 4집, 6집, 7집의 실패가 있었다. 8집에서 다시 반짝 부활하기는 했지만 9집, 10집, 11집이 차례로 참패 팀의 존립조차 위태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평생 방송출연과는 거리가 멀던 사람이 예능프로그램에 나와 평소 하지도 않던 일들을 하며 망가지며 다시 부활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아마 그의 레이스는 부활이 13집 14집 20집을 낼 때까지 계속되리라.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이라던가? 아이들에게 부끄럼없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를 위한 음악이라고. 그래서 혹시라도 표절할까 남의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는 예능에서 기꺼이 자신을 망가뜨려 가며 부활을 알리고 있다. 부활을 위해. 음악을 위해.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그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몸이 된 것도 그래서다. 9집을 낼 무렵 이미 병원에 실려갔었단다. 시한부 판정까지 받았었단다. 영양실조로. 지금도 영양실조로 머리가 빠지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부작용이 심각하다. 그러나 그는 아마 지금도 살빼기를 중단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기타리스트는 말라야 한다...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은 타협할 수 없는 그의 고집이기에. 차라리 달리지 못하더라도.
김태원이 예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다른 멤버들에 피해가 가니까 최대한 조심한다.
김태원은 부활의 리더다. 리더가 다치고 과연 나머지 멤버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까? 남은 스케줄들은? 계획된 콘서트나 행사는? 그가 빠지고 나면 남은 멤버들은 어떻게 할까? 그 또한 그가 짊어져야 할 리더로써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 또한 그가 뛰어야 할 레이스가 아니었을까? 당장의 마라톤만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레이스를 뛰고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레이스를 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선상에서 같은 코스를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의 레이스에서 부진하다고 그것이 그의 모든 레이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스턴을 뛰고자 한다면 런던은 세이브할 수 있다. 올림픽을 목표로 한다면 다른 레이스는 스킵할 수도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달려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보아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완주한 이윤석이나, 그 이윤석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이경규나, 오랜 무릎부상에 괴로워하면서도 역시 마지막까지 비덩다운 멋진 모습을 보인 이정진, 여전히 말많은 수다장이지만 역시 완주에 성공한 김성민, 역시나 체육인이랄까? 여유있게 완주에 성공한 김국진과 처음으로 한 번 일 등을 해 보인 왕비호 윤형빈...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멈춰서고 그들을 끝까지 지켜보아준 김태원...
일곱 남자의 이야기...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다. 때로는 달리고, 때로는 멈춰서고, 때로는 걷고, 때로는 포기해가며, 서로를 지켜보고, 서로를 보듬고, 서로를 응원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그런... 자전거 여행편에서 나왔던 그 한 마디야 말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을 것이다.
"약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모두 자전거 한 바퀴씩 나아갑니다."
끝으로 김태원더러 끝까지 최선을 다해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인간들... 아마 그들이 바라는 것은 떡이 목에 걸려 컥컥거리다 죽어가는 모습일 것이다. 이윤석이 토해가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고통스럽게 달리는 모습이거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싶은 게 아니다. 그냥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지.
나와 가까운 사람이 있을 때 만일 그렇게 무리해가며 뛴다면 제작진이 그랬던 것처럼 먼저 말리고 볼 것이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먼저 멈춰서게 하고 포기할 것을 권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자기 사정이더라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 또한 괴로우니까. 설사 그 끝이 감동일지라도.
굳이 감동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내가 감동하자고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서는 것도 힘겹다는 - 병으로 통원치료를 받는 사람에게서조차 최선을 다하는 일그러진 모습을 바라는 것은 무슨 심리일까?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언가.
아무튼 남자의 자격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최대로 압축해서 듬뿍 담아낸 한 회였다. 눈물이 나도록 시원하고 등골이 서늘하도록 뜨겁고... 남자란... 아마 남자란 그런 것일 게다. 남자답다는 말을 싫어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도 뜨겁고 서늘했던 그들은 남자였노라고.
아름다웠다. 남자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진정.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두에게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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