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서 내내 어린시절 보았던 어떤 만화영화를 떠올렸다. 나중에 한 번 더 해주었던가? 그건 못 봤다. 꼬마 바이킬 비키라고. 난폭한 바이킹들 가운데 유독 몸은 약하지만 머리를 쓸 줄 아는 히컵의 모습에서 폭력을 싫어하지만 지혜로운 비키의 모습을 보았달까? 하기는 이야기는 돌고 도는 것이니까.
흔한 어린이 영화의 패턴을 답습한다. 남다른 개성으로 주위로부터 따돌림당하던 주인공 소년 - 혹은 소녀가 자기만의 재능으로 마침내 무리의 위기를 극복하고 영웅으로 떠받들려진다. 그것은 미운오리새끼 이후 꾸준히 반복되어 온 어린이 이야기의 가장 흔하고 중요한 소재이고 주제였다. 지금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아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아직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그 가능성으로 언젠가는 화려하게 꽃피울 날이 있을 것이다. 하기는 우리나라에서도 바보온달 이야기가 있었다.
주인공 히컵은 한 마디로 사고뭉치다. 가장 강하고 가장 용맹한 바이킹의 왕 스토이크의 아들인 그는 오히려 몸도 약하고 의욕만 넘쳐 항상 사고를 치는 바이킹부족 최고의 골치덩이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운 창의력과 탁월한 기계에 대한 재능은 마침내 가장 강력한 드래곤인 나이트 퓨어리를 포획하는데 성공하고 나이트 퓨어리인 투슬리스를 통해 드래곤에 대해 알아가면서 마침내 투슬리스를 타고 스스로 드래곤들을 위협하던 마룡을 쓰러뜨리고 드래곤과 바이킹족 모두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비록 중간에 투슬리스와의 관계가 드러나며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과감한 행동력으로 역시 또래의 소년들과 더불어 드래곤과 바이킹족의 오랜 오해와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열게 된다.
그야말로 꿈이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아이들이 그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왜 나는 저들과 다를까? 왜 나는 저들만큼 하지 못할까? 무엇보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어머니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친구들로부터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기도 하고 그로 인해 사고를 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항상 갈망한다. 히컵이 그의 아버지 스토이크에게 그러듯.
"나를 좀 제발 봐주세요."
그래서 또 많은 아이들은 그런 꿈을 꾸게 된다. 아니 히컵 자신이 그렇게 사고를 치고 마을에서 골치덩이로 무시당하는 것도 그래서다. 때로 그런 꿈은 크게 엇나가 심각한 문제로도 발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히컵처럼 자기만의 재능과 가능성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 궁극적으로 모두로부터 우러름받는 존재가 되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멀리 미운오리새끼처럼. 그런 꿈 꾼 적 없는가? 나도 언젠가 미운오리새끼처럼 백조가 되고 싶다.
다만 영화는 그같은 어린이 이야기의 오랜 고전을 단순히 답습하는데 멈추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바라는 꿈과 함께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현실에 대한 고민도 전하고 있다. 바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어떤 공포다. 특히 다민족다문화사회인 미국에 있어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편견없는 눈으로만 가능한 어떤 대안들에 대해서. 평화와 화합과 관용과 무엇보다도 공존에 대해서.
드래곤이란 원래 악마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악이며 또한 골치덩이다. 하필 투슬리스가 검은 색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한국인들도 말한다. 아니 91년 미국 LA흑인폭동 당시 흑인들이 주로 한인 상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것도 역시 한국인들이 흑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며 경계했던 탓이 컸다. 한국인에게도 흑인은 두려움이다. 아무런 다른 근거 없이도 단지 흑인이기 때문에, 혹은 히스패닉이기 때문에, 아시안이기 때문에, 미국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비주류의 이방인들인 때문에. 여전히 소외된 소수로서 남아 있는 그들에 대한 미국사회 일반의 경계심.
과연 백인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흑인의 범죄율은 흑인 자신이 악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가 그들을 소외시킴으로써 더욱 범죄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 인종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면 더욱 후자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과연 그들을 극단적으로 범죄로 내모는 이유란 무엇인가? 그것을 영화에서는 공포라 표현하고 있었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이 제시한 답과 같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약간씩의 공포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울증의 원인도 바로 이것이다. 특히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누구나 갖는 소외에 대한 공포. 다른 사람들로부터 외면받는다는 - 하기는 하필 드래곤과 가장 먼저 소통하는데 성공한 히컵이 바이킹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처지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히컵이 사고뭉치가 된 것도, 그리고 마침내 드래곤과 싸우고 드래곤을 사로잡게 된 것도, 드래곤과 마침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가진 공포가 그리로 그를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곤에 대한 공포.
섬의 동굴 속에 살고 있는 거대한 악룡은 끊임없이 드래곤들을 재촉한다. 그들로 하여금 먹을 것을 가져오도록, 그리고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을 때 서슴없이 드래곤을 잡아먹어 버린다. 그래서 드래곤들을 살기 위해서라도 바이킹을 약탈해야 하고, 바이킹을 약탈하는 사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드래곤이란 히컵이 본 그대로 호기심 많고 겁도 많으며 애교도 많은 그런 동물에 불과하다. 단지 살기 위한 절박함이, 그들을 끊임없이 내모는 탐욕이 바이킹에게 그들을 약탈자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일단 먹고 살기 위해서도, 먹고 살만해지고 난 다음에는 남들 처럼 입고 쓰기 위해서도, 그래서 우리사회에서도 범죄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면 거의 이 한 마디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단지 돈을 쓰기 위해서. 소비로써 계량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는 미덕이며 소비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개인으로서 존재로써 흠결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학교 다닐 때도 신발이며 옷이며 메이커가 아니면 상대도 안 해 주었었다. 남들 오락실 갈 때는 함께 가야 하고, 남들 만화방 갈 때는 역시 함께 가주어야 하고, 술 마시면 또 함께, 담배 피는 것도 함께, 그런 아이들끼리만 서로 어울리고 했었다. 남들만 못하다는 것은 굴욕이며, 남들만 못하여 그에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소외이며 공포다. 그리고 그런 소외된 환경에서 드래곤들처럼 겁이 많으면 이내 범죄라는 함정으로 쉽게 빠져들곤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편견을 만들고.
"드래곤은 나쁘다."
"만나면 죽여야 한다."
그러나 본질은 그들 또한 선량한 존재라는 것이다. 단지 배후의 공포를 제거했을 때 그들은 얼마든지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있다. 많은 흑인들이, 많은 유색인종들이, 소수민족들이, 미국 사회에서 그렇게 백인들과 친구가 되어 공존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많은 소외된 이웃들이 친구로서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단지 그럼에도 그런 편견들 때문에.
편부모 가정 출신은 어떨 것이다. 고아라면 어떨 것이다. 혼혈이면 또 어떠할 것이다. 백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들은 거의가 불법체류자이며 범죄자이며 혹은 예비범죄자다. 백인들은 또한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국국적이 없는 재외동포에 대해서도. 동성애자에 대해서. 성매매여성들에 대해서. 그 수많은 편견들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으로써 함게 곤존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려서 가까이에 있던 그야말로 빈민촌을 기억한다. 볕 한 점 들지 않았다. 여름이고 한낮이었던만 어두컴컴파고 퀴퀴했다. 어려서 그곳이 그렇게 무서웠었다. 혹시 무슨 일이나 나지 않을까. 남자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여자들은 벌거벗은 채 욕설을 하고 있던. 아마도 그곳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사실 가장 크게 내 뒤통수를 어린 마음에 쳤던 것이 바로 그 친구였다. 그곳은 지옥이었는가? 범죄자의 소굴이었는가? 단지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이었겠는가?
그렇다고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없다. 과연 그같은 공포를 우리는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그렇게 겁많은 이웃들을 적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공포란 어떻게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빈곤이 공포인 이유는 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부를 추구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없앨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인공은 아이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손쉽게 드래곤과 친해지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 악룡과 맞서 싸우고 있다. 순수가 있다면. 아무런 편견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손을 잡고서 먼저 공존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복지겠지. 복지란 나눔이 아니다. 존재다. 이상이며 신념이다. 같은 사회 안에 존재하기에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 만큼은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 드래곤과 인간이 맞잡은 그 손과 같은 것이 복지인 것이다. 함께 살자. 함께 공존하자.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그러나 최소한의 자격으로 함께 누리고 살자.
많이 정치적으로 흘렀는데, 그만큼 영화는 아주 심오하면서도 직접적인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아니 심오하다기보다는 상당히 파퓰러한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이들을 통해서 보다 노골적으로. 과연 그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애니메이션으로서도 매우 훌륭하다.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색감에서 아, 동화구나. 마치 동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들이 과장되면서도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다. 지나치게 디테일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리얼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과장되어 현실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동작은 자연스럽고 표정도 풍부하며 무엇보다 경관이 아름다웠다. 특히 투슬리스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을 때는 처음 라퓨타를 볼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이제까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비행신이 아니었을까. 격렬하면서도 열정적이었고 우아했으며 아름다웠다.
솔직히 처음에는 또 뻔한 이야기인가 그냥 보지 말까 했었다. 그러나 들어간 돈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훌륭한 구속이며 촉매가 된다. 내 돈이 들어간 만큼 어찌되었거나 인내하고 보자. 다운로드한 것이라면 끝까지 보기 힘들었으리라. 그만큼 통속적이었고, 그러나 익숙한 만큼 또한 새로운 이야기를 안에 품고 있었다. 매혹적인 이야기를.
아이들과 함께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맥주 한 잔 옆에 끼고 곰곰히 생각하며 진지하게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상에 감탄하는 것도.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주제에 고민해 보는 것도. 간만에 아주 좋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생각한다. 애니메이션팬의 피가 다시 끓어올랐다. 멋있었다.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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