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지금에 와서 세시봉이 주목받는 이유...

까칠부 2011. 2. 2. 10:37

사실 매우 간단한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왜 클래식을 듣는가. 아름다우니까. 말 그대로.

 

대중음악이란 - 대중가요란 원래 가사였다. 아름다운 노랫말과 아름다운 멜로디, 그리고 그것을 전해주는 아름다운 사람의 목소리. 그것이 대중음악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혹은 혼잣말로, 혹은 연설로, 멜로디는 강렬한 리듬과 비트의 사운드가 대신하기 시작했고 더욱 개인적이 되어 버린 목소리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있었다. 과잉된 감정과 주제들이 현대인의 감성을 잡아끈 것이었다. 70년대의 소프트록이 어느새 하드록이 되고 헤비메탈이 되고 슬레시며 데스메탈로 진화하는 과정 그대로. 디스코가 일렉트로니카로 진화하며 더욱 강렬한 기계음으로 쉴새없이 두들겨대는 것처럼. 더 이상 멜로디가 주는 아름다움조차 없이 눌리고 찢기고 부서지는 왜곡된 소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물론 그 자체도 나쁜 것은 아니다. 원래 예술이란 하늘에서 시작해 땅위로 내려오는 것이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동경하여 시작했다가 사람 사이의 - 개인의 솔직한 감정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그리운 것이다. 클래식이 그러하듯 음악이 아름답던 시점을. 그것이야 말로 음악의 시작이었을 터이니. 대중음악이 시작된 원점일 것이니.

 

실제 그동안에도 단지 포크가수들이 전면에 나서지만 않았을 뿐 세시봉의 노래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었다. 아마 무슨 노래인가 제목만 모른 경우가 상당하지 않았을까? 누가 불렀는지도 몰랐다가 새삼 부른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았을까? "사랑이야""한번쯤""우리들의 이야기""라라라""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담배가게 아가씨""고래사냥" 마치 구전민요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들이다. 아무리 현대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흥겨워도, 록의 질주가 통쾌하고 좋아도, 알앤비의 호소에 가슴이 촉촉하게 적셔와도, 마치 내 이야기인 듯 남의 이야기인 듯 들려주는 그런 노래들에 대한 갈구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든 음악의 기본이며 인간의 감수성의 기본일 터이니. 마치 클래식이 그렇하듯 그래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다. 이제 와서 세시봉이 주목받는 이유. 단지 세시봉이 주목받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어디선가는 누군가에 의해 즐겨 불려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도 누가 부른지도 모른채 응원가로, 혹은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로, 모두 함께 부르는 자리에서, 그렇게 불려지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흐르던 것이 놀러와를 계기로 보다 구체화된 것 뿐이다. 그 시절의 추억까지 더해서.

 

단지 40대 이상의 당시 세대들의 추억에만 의지해 지금과 같은 호응과 반응이 있을 수 있을까. 역시 이미 문화소비의 주체는 30대 이하다. 그들이 호응했기에 세시봉은 지금과 같은 화제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40대 이상과 30대 이하가 공유하는 어떤 공통된 감성이란. 그동안에도 꾸준히 당시의 노래들이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른다고 - 사람이 달라진다고 음악의 아름다움이, 음악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감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계기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 계기를 놀러와라는 예능이 만들어주었고.

 

물론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세시봉 스타일의 노래를 내놓으면 성공할 것인가? 글쎄... 솔직히 그다지 확신은 없다. 아니 실패하기 쉬우리라. 이미 대중음악의 트랜드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으니까. 지금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알앤비 스타일의 발라드와 일렉트로닉 댄스다. 다만 가능성이 있다면 록이 그러하듯 대중음악의 원점으로서 일정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명맥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지금의 스타일에 맞는 가사와 멜로디 창법이어야 하겠지만. 단지 워낙에 그런 것들이 없다 보니 지금은 신선하다.

 

단지 잊혀졌던 것 뿐이다. 그 이름들만이. 김세환,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이장희, 그리고 한대수, 김민기... 그러나 잊혀졌을 뿐 그들의 음악마저 잊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이 전해주던 그 원초적인 감수성 또한. 그것을 일깨운 것이다. 원래 그런 것이라고. 그것 뿐일 것이다. 새삼 듣게 된 그들의 목소리와 모습들이 너무나 아름답더라.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정겹고 그립더라.

 

사람들이 노래라는 것을 부르게 된 것은 말로서 차마 전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게 된 것은 그것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결코 바뀔 수 없는 것들이다. 노래란 들려주는 것이고 음악이란 아름다움으로써 듣는 것이다. 그 간결함. 그 담백함에 대해서.

 

확실히 음악시장만 조금 더 커지고 비주류음악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만 된다면 이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텐데. 그것은 남는 아쉬움이다. 그러나 역시 갑작스런 것은 아니다.  음악이란 원래 그렇다.

 

이런 좋은 음악들이 공존할 수 있는 대중음악을 꿈꾸며. 음악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노래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