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알려지지 않은 전설 제 6회 강변가요제...

까칠부 2009. 12. 8. 11:22

85년 제 6회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곡은 마음과 마음의 "그대 먼 곳에"였다. 그리고 금상을 받은 노래가 어쩌면 "그대 먼 곳에"보다 더 유명할 어우러기의 "밤에 피는 장미". 이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것이 "민들레 홀씨 되어"를 부른 훗날의 박미경이었다. 참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은 대회였는데...

 

그러나 사실 이해 열린 강변가요제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데 있었다. 입상한 곡들도 물론 훌륭했고, 강변가요제를 등용문으로 데뷔하게 된 가수들도 모두 뛰어났지만, 바로 그들 뒤에 예선탈락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던 어떤 이들이었다. 김태원, 김종서, 이태윤, 그리고 이승철이라는 이름의...

 

바로 전 해 김태원은 용인관광캬바레에서 기타를 치다 문득 생각한 바가 있어 역시 지금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에서 베이스를 치고 있는 이태윤을 만나 The End를 결성한다. 그리고 같은 해 언더그라운드에서 시나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며 인기를 모으다 파고다공원에서 열린 연합콘서트에서 매니저 백강기를 만나 본격적인 프로모션을 시작한다. 김종서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 스쿨밴드가 포함된 합동공연에서 검은진주라는 밴드의 보컬로 출전한 것을 보면서였다.

 

한국의 지미 핸드릭스라 불리우던 김태원, 그리고 4옥타브를 넘나드는 고음보컬로써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와 비교되던 보컬 김종서, 여기에 역시 실력파였던 베이시스트 이태윤과 드럼 황태순... 야심을 품어볼만 했다. 김태원과 이태윤만으로도 대단했는데 이제는 김종서까지. 백강기는 이들을 메이저 무대에 데뷔시킬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당시 신인의 등용문이던 강변가요제.

 

그런데 우연인지 그 해 강변가요제에는 고등학교 시절 각시탈의 보컬로 활동하다가 대학에 진학 파이오니어라는 스쿨밴드에서 활동하던 이승철이 참가하고 있었다. 김태원의 말로는 서대문악기사 시절 이승철을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사실상 이승철과 부활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아무튼 결과는 두 팀 다 예선탈락. 김태원의 변명에 따르면 너무 프로냄새가 나서 탈락시켰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승철의 보컬이 부활을 거치면서 다듬어졌고, 김종서 역시 시나위 2집 시절 저음불가라고까지 불리우며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그랬을까 싶다. 김종서가 솔로시절의 매끄러운 곡소화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시나위를 탈퇴하고 이근형과 함께 했던 카리스마시절을 거치면서부터였다. 더구나 당시 출전곡이 "너에게로"였다면 김종서와 곡의 궁합이 그닥 좋지 않았을 수 있음을 조심스레 추정할 수 있다.

 

즉 어쩌면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철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갓 20살, 김종서와 김태원이 21살 때였으니까. 아직 어린 나이였고 아직 미숙하던 때였고, 물론 그들의 말처럼 아마추어라기에는 너무 프로냄새가 난다는 것이 감점요인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을 극복하기에는 아직 그들이 덜 여물어서가 아닐까...

 

아무튼 그렇게 85년 6회 강변가요제는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김태원과 이승철, 김종서, 이태윤이라는 거물들을 떨어뜨린 대회로 남게 되었다. 아마 한국 대중음악사상 떨어뜨린 면면만으로 보았을 때 가장 권위있는 대회가 아니었을까.

 

결국 강변가요제 예선에서 떨어지고 이승철은 대회장에서 만난 김태원을 쫓아 The End에 가입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김태원 모르게 백강기가 독단으로 결정한 것으로, 무릎팍에 나와 말한 음향장비 사주고 들어갔다는 게 바로 그 이야기다. 김태원은 단지 신해철처럼 밴드를 동경해 쫓아다니던 동네 꼬마인 줄 알았단다. 그래서 김종서 나가고 이승철더러 노래하는 애 좀 구해오라 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고. 이때 또 김태원에게 이승철 노래 시켜보라 권한 사람이 이미 받아먹은 게 있었던 백강기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강변가요제를 통해 이어졌던 셈.

 

그러면 김종서는? 김종서가 The End를 탈퇴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군대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건 김태원이 백강기에게 김종서의 탈퇴를 옹호하고자 붙인 이유였고, 그보다는 굉장히 강압적이던 백강기와의 갈등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싶다. 케이블에 나와서 김종서가 매니저와의 불화를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아 그쪽이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로써 김종서는 부활 1집을 얼마 앞두고 탈퇴, 이미 임재범이 시나위의 보컬로 참가한 것을 보고 신대철의 친구이자 3대에는 빠져도 4대에는 꼭 들어가던 기타리스트 이근형과 작은하늘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나간 뒤 The End 는 End에서 Born Again 부활로 팀 이름을 바꾸고 역사적인 부활 1집을 새로운 보컬 이승철과 함께 내게 된다. 아, 이 무렵엔 이미 이태윤까지 탈퇴한 뒤였다.

 

아마 강변가요제에서 잘만 풀렸다면 김종서는 The End의 보컬로 남았을 테고, 김태원은 팝발라드에 가까운 이승철이 아닌 김종서에 맞는 보다 하드한 음악으로 프로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을지도 모른다. 이승철 역시 굳이 부활이 아닌 본연의 색깔을 살려 대중가수로서 더 화려한 데뷔를 할 수도 있었을지도. 물론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의 음악은 더 짧아졌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뮤지션들이 그렇게 쉽게 데뷔하고 데뷔곡이 곧 유일한 히트곡이자 마지막 곡이 되곤 했었으니

 

말하자면 김태원과 이승철, 김종서라는 빼어난 뮤지션이 성장하기 위한 시련이었달까? 이로써 김태원과 이승철은 만났고, 김종서는 김태원과 결별 이근형을 만났으며, 그로써 이후 자신들이 나갈 음악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으니. 서정락의 김태원과 팝발라드의 지존 이승철, 메탈릭한 고음보컬의 김종서로써.

 

참고로 인터넷을 보면 이승철이 84년 5회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다고 되어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데, 이승철이 66년생인 것을 감안했을 때 이승철이 대학에 입학해 스쿨밴드를 이끌고 참가하자면 나이가 맞지 않는다. 대학 1학년 때라 가정했을 때 85년이 맞고, 86년은 부활 1집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이쪽이 정확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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