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김태원의 위암, 계량되어지는 고통...

까칠부 2011. 2. 28. 22:19

공리주의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과연 쾌락과 고통을 어떻게 계량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더 즐겁고, 어떤 경우데 더 고통스러운가.

 

그래서 공리주의는 때로 개인을 수단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더 고통스러워하는 암환자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초기암따위는 오버하지말고 침착하고 냉정하라. 아니 웃으라. 금방 치료 가능하지 않은가.

 

더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라.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지금 나의 상태와 불만족과 고통은 단지 그보다 더한 사람들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

 

내가 가끔 어떤 이슈들에 대해 도덕적인 응징을 가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도덕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 자체가 목적이며 존중받아야 한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방송을 자제해야 하고. 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공포이고 고통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너 따위는 별 것 없다. 글쎄...

 

그러면 3기 암환자도 4기 암환자가 있으니 티를 내지 말아야 할까? 2기 암환자는 3기 암환자가 있으니 방송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이면 안 될까? 위암보다는 간암이 더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내가 저 주장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을 계량화한다. 그리고 계량화하여 복종을 강요한다. 더 큰 고통을 위해 더 작은 고통의 희생을 요구한다. 대상을 수단으로 보려는 태도다.

 

하기는 우리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더 나은 이익을 위해서.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혹은 더 못하고 더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서. 개인은 없다.

 

솔직담백하게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기를 바란다. 초기암이지만 암이 발견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당사자는, 주위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놀라고 겁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는 그 모든 것들을. 오버하든 절제하든 가감없이 솔직한 반응 그 자체들을. 억지로 삼가고 숨기고 움츠러들 필요 없다.

 

역겨운 것이다. 인간의 고통마저 계량화한다. 인간의 고통과 감정마저 수단화한다. 히틀러가 그랬을 텐데. 박정희가 그랬을 테고. 아마 지금 누군가도. 아직도 기분나쁜 이유다. 화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