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과연 쾌락과 고통을 어떻게 계량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 더 즐겁고, 어떤 경우데 더 고통스러운가.
그래서 공리주의는 때로 개인을 수단화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더 고통스러워하는 암환자와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초기암따위는 오버하지말고 침착하고 냉정하라. 아니 웃으라. 금방 치료 가능하지 않은가.
더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라.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지금 나의 상태와 불만족과 고통은 단지 그보다 더한 사람들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
내가 가끔 어떤 이슈들에 대해 도덕적인 응징을 가하려는 사람들을 오히려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도덕을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 자체가 목적이며 존중받아야 한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방송을 자제해야 하고. 하지만 그것이 당장의 공포이고 고통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거기다 대고 너 따위는 별 것 없다. 글쎄...
그러면 3기 암환자도 4기 암환자가 있으니 티를 내지 말아야 할까? 2기 암환자는 3기 암환자가 있으니 방송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을 보이면 안 될까? 위암보다는 간암이 더 무서우니까? 그러니까?
내가 저 주장에 대해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고통을 계량화한다. 그리고 계량화하여 복종을 강요한다. 더 큰 고통을 위해 더 작은 고통의 희생을 요구한다. 대상을 수단으로 보려는 태도다.
하기는 우리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더 나은 이익을 위해서.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혹은 더 못하고 더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서. 개인은 없다.
솔직담백하게 가감없이 드러내 보이기를 바란다. 초기암이지만 암이 발견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당사자는, 주위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놀라고 겁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고뇌하는 그 모든 것들을. 오버하든 절제하든 가감없이 솔직한 반응 그 자체들을. 억지로 삼가고 숨기고 움츠러들 필요 없다.
역겨운 것이다. 인간의 고통마저 계량화한다. 인간의 고통과 감정마저 수단화한다. 히틀러가 그랬을 텐데. 박정희가 그랬을 테고. 아마 지금 누군가도. 아직도 기분나쁜 이유다. 화가 난다.
'남자의 자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희한한 논리 - 희한한 한국사람들... (0) | 2011.03.01 |
---|---|
남자의 자격 - 라면 박람회... (0) | 2011.03.01 |
남자의 자격 - 암특집과 남자의 자격... (0) | 2011.02.28 |
남자의 자격 - 김태원 위암, 리얼리티와 도덕적 의무... (0) | 2011.02.28 |
남자의 자격 - 꿈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시간... (0) | 2011.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