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어떤 희한한 논리 - 희한한 한국사람들...

까칠부 2011. 3. 1. 10:24

말기 암환자를 둔 가족이 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초기암으로 수술을 하게 된 환자가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가족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1. "그깟 것 가지고 뭘 눈물까지 흘리고 그래? 여기 더 심한 사람도 있잖아? 어디서 감히!"

 

2. "내가 그 심정 알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어서 나았으면 좋겠네."

 

그런데 어떤 사람들 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아마 한국사람들의 본성은 전자인 모양이다. 더 심한 암환자도 있으니 그깟 초기암으로 호들갑떨지 말라. 그런데 그걸 누가 결정하지?

 

내가 더 고통스러우니 네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그런 걸 두고 아집이라 부른다. 내 고통과 남의 고통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더 큰 고통이 있다면 작은 고통도 이해해주어야지 그것도 서열화하는가?

 

더구나 고통의 수준이 낮으니 더 큰 고통을 위해 자제하라. 그것은 곧 개인이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을 그 상위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고인 것이다. 아주 고약스럽다.

 

사실 그 주장 자체는 타당하다. 너무 암이라는 질병을 방송을 위해 과도하게 포장하거나 이용하지 말라.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병을 방송을 통해 내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당사자에게도 실례가 되는 일이다. 김태원이 방송에 자기의 병을 알리고 보이고자 한 것은 그런 뜻에서가 아니었을테니.

 

문제는 그 논리의 전개방식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으니? 그러니까 고통도 계량화해서 서열화하고 그것을 서사적으로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개별적인 개인의 사정이나 상태에 대해서마저 서사적 구조 안에 종속시켜 지배하려 들고 있다. 내가 이 논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이유다.

 

고통이란 개별적인 것이다. 감정 역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이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타자를 전제한 것이다. 존중을 전제해야지 그것을 판단하고 단정짓고 객체화한다? 인간을 뭐라 보는 것일까?

 

고통 가지고도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과 더불어, 그것도 제 3자가 계량화하여 객체로써 대상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저 신선할 뿐.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암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과장하여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는 개인의 존엄과 존중에 대한 문제로써 다가가야지 무슨 더 고통스러운...

 

그러면 말했던 것처럼 3기 암환자는 4기 암환자 있으니 입다물고 있을까? 아니면 4기 암환자도 암으로 죽은 사람도 있으니 고통을 말해서는 안될까? 웃기지도 않아서.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존중해서 그런 말을 하는가? 그렇다면 또 다른 개인을 존중하지 않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겠지.

 

병을 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은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예의.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 자신을 위해서다. 전제를 바로 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고귀한 목적에도 인간은 수단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