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사람 - 심수봉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 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번쯤은 생각해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 때 그 사람
외로운 내 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도 감싸주던 다정했던 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며는 안되겠지
다시는 생각해서도 안되겠지
철없이 사랑인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 할 그 때 그 사람
가사 출처 : Daum뮤직
문득 한 편의 드라마가 떠오른다. 아마 남자는 유부남이었을 것이다. 당당히 밝히고 만날 수 없는 사이였다. 떠난 사람을 못 잊였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일까? 심리적 거리일까? 떠나간 것일까? 떠나보낸 것일까? 다른 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그녀는 어쩌면 아직 어린 사회초년생이었을 것이다.
항상 만나면 아프고 괴롭고 그러나 그조차도 운명으로 여긴다. 가장 외로울 때 항상 곁에 있어 주던 사람. 그러나 헤어짐에도 안녕이라 말조차 못하고, 이제는 사랑이었다 이야기조차 못한다. 미워할 수조차 없이 그저 그리워 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래서 잊어야 하는 사람.
당시 유행하던 신파조의 이야기일 텐데, 그런데 이와 함께 떠오르는 한 이야기가 있다. 루머였을까? 사실이었을까?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와 얽힌 스캔들이었다. 여기서도 아마 병원이 나올 테고, 기타가 나올 테고, 떠난 사람을 그리며 항상 괴로워했다는 것은 그러고 보니 그 무렵 스캔들로 인해 잠적하느라 심수봉의 데뷔에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니었으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지도 않았다.
노사연의 회고가 기억난다. 78년, 전해 1회 대학가요제에서 아마추어티 풀풀 풍기는 샌드페블즈가 '나 어떡해'로 대상을 받으면서 온갖 대학가의 고수들이 대학가요제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 주류는 아무래도 포크와 록. 청바지와 통기타가 당연하던 그때 홀로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차려입고는 전혀 아랑곳 않고 피아노에 앉아 노래를 부르더라고. 심수봉이었다. 본선에서 떨어진 노래가 바로 이 '그때 그사람'이었고.
원래 노래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나훈아의 눈에 띄어 음반을 내려던 중이었었다. 그러다가 나훈아가 갑작스레 잠적하게 되면서 돈이 많이 드는 음반제작을 아직 어린 여대생에 불과하던 심수봉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출전하게 된 대학가요제였는데, 그러나 본선에서 탈락한 그녀를 지구레코드에서 픽업해 대망의 데뷔앨범을 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앨범은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안가에 그녀를 부르게 만들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심수봉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기억. 원래의 그때 그사람은 어쩌면 바로 그 사람이었을 테지만, 어느 사이엔가 사람들은 그때 그 사람 하면 다른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다. 10.26, 차지철, 김재규, 시해, 안가, 전두환, 12.12, 1979년, 바로 그 사건이. 그로 인해 역사속의 이름이 되어 버린 그가. 오래도록 정권에 의해서, 그리고 그 기억을 못 잊은 대중에 의해서, 무엇보다 그 끔찍한 일을 직접 눈앞에서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로 인해 고통받아야 했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불행한 역사의 또 한 사람의 피해자였다.
아무튼 참 특이한 노래다. 얼핏 재즈인가 싶기도 하고, 클래식에서와 같은 스케일이 느껴지기도 하고. 여느 트로트와는 확실히 달랐다. 뭔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심수봉의 비음이 섞인 독특한 음색까지 어우러지며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세련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굉장히 오래된 노래다. 그러나 결코 오래지 않다.
역시나 당시는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 전환기였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대중가요였던 트로트는 어느새 밀려드는 서구의 선진적인 음악에 의해 한 꺼풀 진화하고 있었다. 아니 원래 트로트라는 자체가 서구의 폭스트로트의 리듬에서 유래한 음악이다. 고고리듬을 만나고, 록의 비트와 사운드와 어우러지고, 그리고 재즈와 스탠다드의 느낌이 섞여들었다. 클럽무대를 통해 록을 체화한 이들이 트로트고고를 유행시켰다면, 대학생이었던 심수봉은 다른 느낌으로 트로트에 접근했었다. 그리고 그런 시도와 실험들이 80년대 발라드라고 하는 새로운 한국 대중음악의 스탠다드를 출현시킨 것이었다. 만일 10.26이 없었고, 그래도 대중음악인들이 대접받는 환경에서 활동했으면 심수봉의 음악은 어떤 형태로 한국대중음악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면 80년대란 여전히 대중음악인들이 홀대받던 시기이기도 했던 터라. 트로트를 한다는 것이 뭔가 촌스럽게 여겨지던 때이기도 했다. 여기에 불행했던 바로 그 사건도 있었고. 그녀가 자신의 음악세계를 드러내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안 받쳐주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불행했을 음악인. 하지만 확실히 그녀의 음악은 트로트이면서도 뭔가 모를 고급스런 느낌이 난다. 그녀 자신의 의도한 바이기도 하고.
과연 실화였을까? 너무나 가사가 구체적이어서. 그리고 내가 들은 그 루머의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그래서 루머 자체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그와 함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치 드라마처럼 그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뭐 그런 것도 음악을 듣는 한 방법이기는 할 테지만. 가사가 멜로디에 착착 감겨드는 것이 마치 오랜 영화속 주인공이 된 양 노래에 잠겨들게 한다.
참 좋은 노래다. 시간이 흘러도 멜로디가 촌스럽지 않고 매우 고급스럽게 아름답다. 우아하다고나 할까? 당시의 여느 대학생들과는 달랐다던 심수봉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같고. 시대의 한 부분이었다. 이제는 아주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항상 감탄하며 듣는 노래다. 아련함이 문득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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