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남인수 - 황성옛터...

까칠부 2011. 5. 10.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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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 - 남인수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왔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가사 출처 : Daum뮤직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노래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떠오르곤 하는 시조다. 고려말 충신이자 유학자로 이름 높았던 포은, 목은, 야은의 삼은 가운데 야은 길재의 작품으로, 이미 망해버린 왕조의 옛도읍을 찾아 그 소회를 읊은 시조였다. 역시 이 노래에서도 배경은 작곡가 전수린의 고향인 개성이었다.

 

원래 제목은 황성의 跡, 말 그래도 황성옛터다. 작곡가 전수린은 1907년생으로 개성이 고향이었으며, 일찌기 학창시절 미션계열인 개성 소도고보를 다니며 역시 미션계열인 호수돈 여고의 여교장인 리클스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우울하기만 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식민지의 청년으로써 아무런 배경 없이 음악가로 성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수린 역시 따라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떠밀려 동방예술단이라는 유랑악단의 연주자로 음악인생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아마 1929년이었을 것이다. 22살의 청년 전수린이 다시 고향을 찾았을 때 청운의 꿈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동가식서가숙하며 막간에 효과음을 내거나 가수들의 반주나 하는 악단의 연주자로 하릴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고려왕조 5백년 도읍지의 옛궁궐터인 망월대와 식민지 청년으로서의 당연한 울분, 더구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막막하기만 한 현실이 그래서 노래로 쓰여진 것이었다.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왔노라

 

가사 가운데 이 부분이야 말로 당시 전수린이 느끼던 소회였을 것이다. 허무와 절망, 좌절... 그것은 당시 식민지 청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던 공감대였다. 그것을 전수린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유랑극단에 몸을 담고 있던 왕평이 가사를 붙여 동방예술단의 여주인공 신일선에게 부르게 했으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다. 서울에서 이애리수가 불렀을 때는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공연을 중단시켰을 정도로 당시 식민지 조선의 뭇대중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었다. 자신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희망이라고는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했던 그 절망감.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꿈조차 꿀 수 없는 끝없는 좌절감. 어떤 이들은 그래서 시류에 영합하며, 더 많은 이들은 현실에 체념하고, 그렇게 식민지 조선의 백성임을 체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노래가 들려왔으니. 황성옛터라 했을 때 그것은 고려의 황성이었을까? 대한제국의 황성이었을까? 망국의 백성이 갖는 소회야 고려의 백성이나 조선의 백성이나 무에 다를까?

 

결국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왕평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밤새 조사를 받아야만 했었고, 노래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미 들려진 것을 어찌하겠는가? 입에서 입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노래는 해방 이후까지 불려지며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민족가요였다.

 

더구나 이 노래가 특별하다는 것은, 과연 트로트의 발상지가 어디인가 하는 논쟁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를 트로트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정작 발표된 가장 오래된 트로트 가요는 다름아닌 바로 이 황성옛터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아무튼 일본 엔카가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가 마사오가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었고 황성옛터가 그보다 조금 빨랐던 점을 들어 트로트가 사실 한국에서 먼저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기는 트로트라는 자체가 일본전통음악을 현대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기존의 일본식 5음계와 2박자, 4박자 멜로디에 서양의 폭스트롯 리듬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음악과 아마도 조선의 음악의 영향을 받아 보다 구체화하고 양식화했을 것이다.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의 주도 아래 동아시아의 문명이 서로 교류하고 서양의 문화가 전해지는 가운데 하나의 흐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전수린이 있었고 고가 마사오가 있었을 테고. 분명한 것은 황성옛터야 말로 한국 트로트의 뿌리라는 것이다.

 

엔카는 2박자를 기본으로 한다. 폭스트롯도 2박자 리듬이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음악은 3박자가 기본이다. 중국도 2박자, 4박자다. 그렇다 보니 일본과 중국은 무리없이 서양음악을 받아들였는데 한국에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2박자의 폭스트롯과 일본의 엔카, 그리고 3박자의 전통민요. 같은 트로트이면서도 한국의 트로트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들리는 이유는 그래서다. 그리고 그 시작이 황성옛터였다.

 

노래는 남인수가. 원래의 이애리수 버전은 찾기도 힘들고 사실 잘 알지도 못한다. 어려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남인수 베스트 테이프를 통해 주로 들었는데. 약간 노이즈가 낀 레코드판을 빨리 돌려 듣는 듯한 느낌이 남인수 버전의 독특함이다. 내가 황성옛터를 부르면 조금 엇나가게 부르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노이즈를 만들어서 원래 빠르기보다 조금 더 빠르게. 비브라토를 거칠게 넣는 것이 포인트다.

 

그제는 남진의 '빈잔'을 듣고, 또 그 전에는 심수봉의 '그때그사람'을, 그러다 보니 문득 듣고 싶어져서. 한국 트로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노래 아니겠는가. 그 역사적 의미와 같이. 70대 노인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암울한 허무를 노래하는 20대 초반의 젊은 작곡가의 노래에서. 그 시대에 대해서.

 

많이 촌스럽다. 요즘 노래들에 비하면 한참 오래된 느낌이다. 바로 그 오래된 느낌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렸다. 그 시대의 아픔마저. 그렇더라도 음악 자체는 여전히 남아 들려온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을 싣고. 그 시절의 감정들을 담아서. 음악을 듣는 이유일 것이다. 밤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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