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안미녀 - 우울한 코미디...

까칠부 2011. 5. 11. 09:53

웃음의 기본은 낙천과 긍정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즐거워지는 것이다. <무한도전>에서 노긍정 노홍철이 말했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한 것이다. 그것이 코미디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 순간만이라도 즐겁고 행복하기를.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는 장르에 코미디라고 하는 단어가 붙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이란 인류보편의 소재일 터다.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꿈꾼다. 사랑을 추억하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을 기다린다. 그 설레임과 기쁨을 특별한 연인들의 유쾌한 헤프닝을 통해 웃으며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서로 만나고, 반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확인하고, 그리고 함께 하기까지, 아니 함께 하고 나서도 어디 우여곡절이 하나 없을까? 그러나 그조차도 이미 사랑을 하게 되면 사소할 뿐일 테니까. 아직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그조차도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드는 과정일 터다.

 

당장의 어려움이나 곤란조차 사실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못된다. 앞에 놓인 어떤 난관도 그저 한 바탕 코미디처럼 우스울 뿐이다.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고 지나고 나면 그저 우습기만 할 뿐이다. 우스워서 우습고, 우습지 않아서 우습다. 세상 일이란 그렇게 심각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코미디를 보며 위안을 얻고 힘을 얻는다. 낙천할 수 있는 위안과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그로부터 받는다.

 

굳이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고 주눅들고 위축되어서야 보는 사람마저 덩달아 우울해지고 말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자수성가형 드라마에서도 항상 낙천하고 긍정할 수 있는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아 중심에 놓는다.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현실이 그토록 암울하고 절망스럽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조차 웃을 수 있고, 웃으려 할 수 있다. 지금을 긍정하고 앞으로를 낙관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그 암울하고 절망스럽던 상황마저 딛고 일어나 시청자와 더불어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보는 사람들도 기꺼이 기대하며 지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무언가? 도대체 언제쯤이나 되어야 이소영(장나라 분)의 불행은 끝이 나려는가? 동생 이소진(오연서 분)만을 편애하는 엄마(김혜옥 분)에, 제멋대로인 동생으로 인해 무려 9살이나 나이를 속여가며 동생의 이름으로 항상 불안해하며 직장에 다녀야 하고, 그나마 직장에서 가깝게 지내는 최진욱(최다니엘 분)은 항상 그녀를 곤란에 빠뜨리는 민폐캐릭터다. 직장 동료라고 편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기를 하는가? 주위에 다가오는 남자라고 해봐야 혼자 멋대로 사랑하고 멋대로 차버리고 떠나는 선남(박철민 분)이나 나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40대이 백화점 팀장 정도다.

 

하지만 그런 정도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어지간히 주인공 괴롭히기 좋아하는 드라마라면 이런 정도는 거의 기본으로 한다고 보아도 좋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주인공 이소영의 태도다. 동생 이소진도 그 부분을 지적한다.

 

“솔직히 네가 나 아니었으면 언제 이런 상을 다 받아 보냐?”

 

분명 디자인은 이소영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소영은 지레 안 될 것이라며 그것을 포기했다. 오히려 그 디자인을 가지고 응모하여 대상을 받아낸 것은 이소진이었다. 차라리 이제라도 이소영임을 밝히고 정식디자이너로 채용해달라 말하라는 이소진과 그것을 대번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무시하기부터 하는 이소영과, 얼핏 경우에 바른 모습으로 비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체념에 익숙해 있을 뿐이었다.

 

“나 따위가...”

“내가 어떻게...”

“그게 되겠어?”

 

그렇게 익숙해 있는 것이다. 자기를 비하하고, 그러면서 주위를 탓하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을 그렇게 내모는 주위의 환경과 사람들과 무엇보다 불운에 책임을 돌리고. 그런 자신에 취해 있는 것이다. 그런 자기연민에 빠져서 거짓말로 회사에 다니고 있으면서 그 거짓을 들키기 싫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마저 포기한다. 그런 자신에 대해서조차 그녀는 경우에 바르다 옳다 착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더 곤란한 처지에 내몰리기 싫은 비겁함이고 비루함일 뿐인데도. 이소진의 말이 정답일 것이다.

 

“너는 평생 계약직이 팔자인가 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은 몸으로 지승일(류진 분)의 집을 찾아가 일일이 동전을 줍고 있는 그 궁상이야 말로 이소영의 본질이랄까? 아마 그 순간에조차 그녀는 자기 연민에 빠져 그런 모습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불행해. 나는 불쌍해. 아마 그녀에게 그러한 현실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되든 안 되든 응모를 하던가, 아니면 대상을 받은 작품이 자신의 것이라며 창피함을 무릅쓰고라도 도전해 보았겠지. 안 되면 마는 것이지만 된다면 오래도록 꿈꾸어 오던 것을 이루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비루한 자존심은 모양을 구기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차라리 현재를 유지할 뿐.

 

내내 내리는 비만큼이나 보고 있던 필자마저 우울해질 것만 같은 드라마였다. 아무리 회사일이라고 하지만 내키지도 않는 소개팅을 나가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거절하지도 못한다. 아마 그 순간에조차 역시 불행한 자기의 모습에 도취되어 있었으리라. 자기 입으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최진욱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앞으로 조금은 나아지려는가? 나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대로라면 이소영은 단지 주어진 것들을 주워먹기만 하는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신데렐라도 아니고 단지 그냥 인형일 뿐이다.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주고. 우연히 눈에 띄어 우연히 도움을 받고 우연히 사랑에 빠지고.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는 더욱 않다.

 

전혀 기대가 생기지 않는 것은 정작 주인공 자신에게 그럴 의지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조차 불쌍해지려 할 뿐 스스로 자기 힘으로 한 발 내딛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장나라의 쏘아붙이듯 내뱉는 대사들이 공허한 것은 그래서다. 자기한탄이고 자기연민일 뿐 정작 실속은 없다. 앞으로 어쩌겠다는 약속이나 선언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타이틀은 분명 로맨틱 코미디일 텐데, 하지만 <이소영씨의 디자이너 성공기>로 제목을 바꾸려 해도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오로지 지승일과 최진욱 두 남자만이 빛이며 소금이다. 밝음도, 의지도, 노력도, 희망도 오로지 이 두 남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이소영이 주인공인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가?

 

참으로 난감한 드라마라 할 것이다. 우울한 것으로 웃기는 것은 좋은데 그것도 어느 정도일 것이다. 한없이 우울해지고, 우울해진 만큼 망가져가는 장나라를 가지고 웃으며, 낙천과 긍정의 힘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공허하기만 한 헛웃음만이 남아 있을 뿐. 

 

단지 몇몇 장면에서 가지로 웃겼다고 그것을 로맨틱 코미디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중심은 로맨스, 로맨스의 중심은 그 당사자인 주인공, 주인공의 힘이 거의 절대적인 것이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다. 변화가 필요하다. 아직은 무리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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