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이야기다. 아마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동거에 들어갔을 것이다. 전부터 사귀던 사이였고 결혼을 약속하고 양가의 부모들로부터도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전혀 문제없이 이제 취직도 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결혼도 해서 알콩달콩 살면 되겠구나.
그런데 덜컥 여자친구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이었다. 20대 초반에 아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다. 아마 드라마에서 고석빈(온주완 분)이 보인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놀라고 당황해서는 잠시 고민하더니만 이내 여지춘게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지우자!"
결국 아이를 지우고 두 사람은 두 달인가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아이를 지우는 데까지는 동의했지만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여자친구가 끝내 감당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도미솔(이소영 분)이 고석빈에게 말한다.
"우리 서로 좋아한 것 맞지?"
친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원치 않은 임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지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 여자친구도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인정받고 싶어 했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간이 아니더라도 살아있는 생명에게 있어 임신을 하고 후손을 낳는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일 터이므로.
고양이도 그래서 임신을 하게 되면 그렇게 예민해진다. 뱃속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래서 사람도 예민해진 나머지 인정받고 싶어하고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모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로부터 부정당했을 때 여성은 크나큰 심리적 상처를 받는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를 지워야 하는 상황이다. 뱃속의 아이를 죽여야 하는 것이다. 몇 달 있으면 세상에 나와 마주하게 될 자신의 아이를 채 얼굴도 보지 못하고 무정하게 죽여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에 대해 인정조차 받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한다면.
겉으로 아무렇지 않다고 속까지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진정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만큼 이미 그 속은 너덜너덜 상처가 덧나고 덧나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채일 것이다. 상처가 깊은 사람만이 더 잔인해지고 냉혹해질 수 있다. 그보다는 무심해진다. 도대체 태연히 아이를 낳고 죽이고 버릴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어떤 깊은 상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이 문제였다. 아이를 지우는 과정에서의 상처가. 그리고 아이를 지우고 나서의 상처가. 더 이상 친구를 남자로써 신뢰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이를 부정했다. 아이를 임신한 자신을 부정했다. 그리고 아이를 죽였다. 자신도 동의했음에도.
상처의 무게가 다르다. 남자의 필요해서 자식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자식도 얼마든지 저버릴 수 있다. 그에 비해 여자는 임신하고 낳아서 자식이다. 이미 임신하고 뱃속에서 새생명이 자라나는 순간 여성은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식한다. 막상 태어나고 얼굴을 마주 하고서야 그때에도 그럴 동기가 있어서 자식임을 인정하는 아버지와는 다르다.
너무나 쉽게 낙태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이야기하고, 임신 자체를 죄악시여긴다. 임신이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불미스럽고 부도덕한 행위라, 죄라, 그로 인해 여성이 입어야 하는 상처란 도대체 어떠할 것인가 말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에 대한 교육일 터인데도 정작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며 당사자들을 떠밀어내려고만 들고 있으니.
또 하나의 이야기는 뉴스를 보고서 알게 된 이야기다. 아마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여중생 성폭행 사건을 알 것이다. 당시 가해자 부모 가운데 하나가 피해자가 전학간 학교를 찾아가 합의를 강요하며 난리를 피웠던 일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정작 피해자이고 가해자의 부모일 텐데도 오히려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피해자가 되어 피해자를 가해자인 양 윽박지르고 있었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역시 실제 겪었던 이야기다. 성폭행사건이 벌어졌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한 여자를 성폭행한 악질적인 집단성폭행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결국 얼마간의 합의금으로 마무리되고 말았고, 그 가해자의 부모는 나중에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합의금 노리고 꼬리를 친 것이지..."
성폭행으로 인해 당사자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예 생각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식 뿐이다. 내 아들. 내 가족. 그래서 조금이라도 피해가 돌아올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을까. 그래서 오히려 피해자인 여성이나 그 가족에게 큰소리친다.
"내 자식 어쩔 거냐?"
"내 가족을 어쩔 거냐?"
하기는 그러니까 지난주에도 도미솔의 엄마 봉선아(김미숙 분)도 아무렇지도 않게 임신한 딸 도미솔 앞에서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친구와 더 이상 연락도 하지 말라 다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의 입장은 생각지 않는 어머니의 이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석빈의 엄마(배정자 분) 역시 자신의 아들을 위해, 아들의 앞날을 위해 도미솔을 죄인처럼 다그칠 수 있는 것이고. 고석빈이 어떤 짓을 했든 고석빈을 위해서라도 도미솔은 그래서는 안되었다. 설사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어도 자신의 아들에게 조금도 나쁜 영향을 미쳐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임신이라니.
정말이지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랄까? 배정자며 봉선아며 너무나 현실적인 부모들이다. 평범하게 자식 장래를 걱정하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헌신하고, 그를 위해 주위의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대학과 출세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성이 어떻고 바른 삶이 어떻고 현실에 그런 부모는 그다지 많지 않다.
봉선아가 딸 도미솔에게 어떤 고민이든 다 들어주마고 이야기했을 때 도미솔이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포기하고 마는 것도 그래서다.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작 가장 필요할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에 더 이상 부모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부모도 모르는 새, 아니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 처리되고 있을까? 전혀 다른 방법으로, 왜곡되어진 채, 자신들에 독이 되는 방법으로.
아는 것이다. 당장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알려오자 오히려 그 사실을 부정하며 오로지 대학과 출세만을 이야기하는 배정자야 말로 부모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과연 그 자리에서 도미솔이 임신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해봐야 봉선아는 과연 그것을 진지하게 듣고 대책을 함께 고민해 주었을까? 지난주 이미 봉선하는 도미솔 또래의 임신에 대해 확실하게 거부의 뜻을 밝히고 있었다.
가엾은 것이다. 임신을 했는데 도움을 청할 어른 하나 없이 직접 화장을 하고 병원을 찾아야 하는 도미솔의 처지가. 여자친구의 임신에 대해 어디 하나 도움을 청할 곳 없이 직접 손을 잡고 병원을 찾아 떠돌아야 하는 고석빈의 처지라는 것도. 그래서 결국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란 또래의 친구들. 그조차도 과연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또 얼마전 한 고등학생 커플이 아이를 낳은 뒤 죽여 유기한 사실이 언론지면을 통해 보도되고 있었다. 누구의 탓일까? 그래도 자기가 낳은 아이인데 죽여서 버릴 수 있는 잔인함은 과연 누가 그들에게 전해준 것일까? 원래 타고난 악인 것일까?
내내 이입하며 보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사실 그렇게 대단하게 재미있는 드라마도 아닐 텐데. 참 구질구질할 정도로 일상의 이야기들만이 무덤덤하니 늘어놓아질 뿐이었다. 자극적인 설정도 흥미를 잡아끌만한 내용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결코 눈을 뗄 수가 없다. 역시 바로 그 일상의 이야기인 때문이다. 내 가까이에,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다.
고석빈의 한심한 모습에 분통을 터뜨리다가도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내 친구도 그랬으니까. 아마 많이들 그러지 않을까? 사고를 칠 때가 다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다르다. 그나마 고석빈은 참 착하고 성실한 녀석이다. 부모를 욕하고 마는 이유다.
이번에도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하면서 보았다. 한탄도 하고. 혀도 차고. 고개도 끄덕이면서. 과연 이야기가 어디까지 어떻게 진행될까. 행복해졌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 바람일 것이다. 그래도 행복해졌으면. 드라마를 보는 이유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라도.
좋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드라마였다. 더욱 그런 뉴스도 있었기에. 다만 그다지 시청율도 화제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뿐. 아마 너무 무거운 소재인 때문일 것이다. 불편한 현실이기도 하고.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정말 아까운 드라마다. 안타깝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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