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윤수일 - 제 2의 고향...

까칠부 2011. 5. 2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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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고향 - 윤수일

사방을 몇바퀴 아무리 돌아봐도
보이는건 싸늘한 콘크리트 빌딩숲
정둘곳 찾아봐도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거리를 하루종일 아무리 걸어봐도
(걸어봐도)
보이는건 한없이 밀려오는 자동차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띵하지만
(띵하지만)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밤이면 빌딩위에 걸린 초생달
쓸쓸한 내 마음을 달래주누나
우우우 우우우
너의 모습처럼 친구가 그리워서
앞의 집을 둘러봐도
(둘러봐도)
보이는건 까마득히 쌓아올린 벽돌담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서 왔~지만
(왔~지만)
그래도 나에겐 제2의 고향
밤이면 창~가에 모여든 별들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누나
우우우 우우우 너의 마음처럼
우 우우우 제2의 고향
우우우 제2의 고향
우우우 제2의 고향
우우우 제2의 고향

가사 출처 : Daum뮤직

 

윤수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다름아닌 이방인의 정서다. 도시에 섞이지 못하는 주변인. 그보다는 주류에 섞이지 못하는 비주류의 정서였을 것이다.

 

윤수일 자신도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었다. 그는 한국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이고 이방인이었다고. "외로운 밤", "외로워요", "내마음 외로워" 등 대놓고 외로움을 토로한 노래들 말고도 자작곡은 아니지만 "유랑자"나 이 노래 "제 2의 고향", "아파트", "도시의 천사"에 이르기까지 서울이라고 하는 도시에 섞이지 못하는 - 한국이라고 하는 사회를 겉도는 주변인이자 이방인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2006년 발표한 "숲바다 섬마을"에까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이 아니지만 한국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완고한 혈족주의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속하지 못하는 혼혈인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자랐고 한국의 문화를 체화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지만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그는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원죄였다. 아니 사실 윤수일의 경우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가 누구인가도 알았고, 단지 사고로 어머니를 불러들여 결혼을 하기 직전 사고로 목숨을 잃은 탓에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어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의부 윤성환씨로 인해 보살핌을 받고 자랄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에게는 음악이 있었다.

 

당시 아무래도 미 8군 무대 출신들도 있고 해서 대중음악계는 그나마 한국사회에서 가장 혼혈에 대한 차별이 적었던 분야이기도 했다. 그래서 박일준이나 인순이 같은 훨씬 터부가 심한 흑인혼혈들도 가요계를 통해 주류무대에 진출하고 대중적인 인기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나마도 뒤에서는 튀기라는 경멸과 조롱을 감수해야 했지만 말이다. 아마 82년 수 년에 걸친 MBC 출연정지의 빌미가 되었던 윤수일의 PD폭행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분명 대중적인 스타였지만 또한 여전히 한국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며 주변인이었다. 그것은 이유진이 데뷔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기억하는 이야기다. 이유진이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혼혈이라 차별받은 것을 이야기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에 반박하고 나섰었다. 혼혈에 대한 차별이 어디 있는가? 한국사회에 무슨 혼혈에 대한 차별이 있었을까? 하인스 워드가 방한하며 혼혈에 대한 차별이 공론화된 것이 그 몇 년 뒤였다. 차별인 줄도 모르고 차별하고, 차별하는 말이며 행동을 하고서도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제는 혼혈이 아니더라도 국적이 다르다고 공공연히 증오를 내비친다. 캐나디언. 미국인. 쪽발이.

 

그래서 그의 노래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이 보이고 있는 것일 게다. 외로운 어린 소년이 기댈 곳이 어디 있었을까? 어머니와 그리고 음악. 그리고 그 음악을 통해 윤수일은 자신의 고독과 소외감을 승화시켜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음악이 80년대 크게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80년대라면 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많은 이방인들이 서울이라는 도시로 몰려든 때였다. 여전히 주변인으로 머물며 서울에 정을 붙이고 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이방인이고 주변인이었다. 그래도 서울을 이제 제 2의 고향이라고 정붙이고 살아야 한다. 그 고독과 소외감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여전히 이방인이고 주변인이면서도 고향삼아 살아야 하는 윤수일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윤수일은 자신의 소외를 이야기했고, 대중은 그로부터 자신의 고독을 들었다.

 

여전히 국민가요로까지 불리고 있는 "아파트" 역시 그러한 고도성장기를 통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아파트와 그로부터 소외되어 겉도는 도시인의 정서를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아파트라 하는 자체가 전통적인 촌락사회에서의 삶과 유리되는 도시의 냉혹함과 무심함을 대변하는 듯한 이미지였으니. 연인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남자의 정서란 그같은 도시인의 정서가 아니었을까. 다만 그 서럽기까지 한 가사와 멜로디와는 어울리지 않게 사운드는 록사운드 특유의 흥겨움이 있다. 아직까지도 국민가요로써, 그리고 국민응원가로써 불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제 2의 고향"이란 바로 그러한 윤수일의 음악적 정체성을 드러낸 윤수일이 비로소 음악적으로 자립하는데 성공한 첫작품이었다. 쉴 새 없이 가슴을 울려 오는 드럼의 비트와 베이스의 울림에 실린 흥겹고 정겨운 멜로디. 가사는 우수에 찬 것이 그래도 서울을 고향삼아, 한국을 고향삼아 살아가야 하는 이방인이자 주변인의 다짐을 보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저기 먼 시골이 고향이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보다 더 먼 섬에서 떠나와 항상 고향의 김을 자랑하던 이모부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록이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구나. 이런 강렬한 - 당시로서는 매우 하드한 록사운드였다. 사랑과 평화나 조용필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 록사운드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구나. 그것이 대중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다면. 대중들이 바라는 감성을 전할 수만 있다면. 지금도 씨엔블루나 FT아일랜드, 이전에는 버즈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노래할 것. 그 시대의 정서를 노래할 것. 그 시대의 사람들의 감성을 노래할 것. 변하지 않는 법칙일 테지만.

 

다만 아쉽다면 1집의 성공에 이은 82년 대망의 2집에서 그만 윤수일이 MBC의 PD와 언쟁 끝에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이후 수 년간을 MBC로부터 출연정지를 당하고 있었다는 점일 게다. 윤수일의 전성기를 흔히 윤수일밴드의 2집에서 4집까지로 꼽는다는 점에서 이 시기가 대부분 MBC로부터의 출연정지로 인해 방송활동이 절반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그에게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가요톱텐 골든컵을 무려 두 번이나 받았던 84년에조차 10대가수도 가수왕도 그의 몫은 아니었다. 아마 그것이 이후 윤수일이 트로트를 부르게 된 것을 포함 윤수일의 음악이 저평가되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커리어 면에서 많이 밀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지금도 내가 윤수일의 음악을 찾아 듣는 이유. 지금 들어도 윤수일만이 독특한 감수성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다. 분명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록이 전하는 원초적인 흥겨움과 가사와 멜로디에서 느껴지는 우수는 한국인이기에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녹여내고 있다. 그의 음악이 지금까지도 명곡이라 일컬어지며 불려지고 들려지는 것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시간조차 흘려보내지 못하는 무엇이 그의 음악에는 있기에. 80년대 조용필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에는 윤수일도 있었다.

 

참고로 윤수일은 최초의 가수출신 예능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TBC에서 하던 한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다. 나중에 이상해와 콤비로 팬토마임을 하며 이주일이 팽귄춤으로 스타덤에 오르기도 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여기에서 윤수일이 타잔 복장을 하고 줄을 타고 했었다. 이때 윤수일과 부딪히면서 이주일이 유명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당시 유행하던 "나나"라는 노래와 타잔 복장을 한 껑충하게 키가 큰 희한하게 생긴 가수 정도만 알 뿐이다. 당연한 것이 학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

 

그러고 보면 1981년. 확실히 대중음악이란 대중의 감성을 대변한다. 만들기야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그 시대에 히트한 노래들은 그 시대의 정서를 담은 노래들이다. 음악을 통해 시대를 읽는다. 음악을 통해 그 시대의 감수성을 읽는다. 그리고 아티스트를 읽는다. 음악을 통해 시대와 사람과 아티스트를 만나는 이유다.

 

어쩌면 참 불운했던, 한국의 대중음악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재능있는 음악인이 걸어야 했던 인생역정. 그리고 그 시대를 통해 지금 우리가 봐야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는 그것들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시켰고 그 시대 사람들을 위로해주었다. 록이니 뭐니 하는 장르란 무슨 상관인가.

 

언제고 반드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아니지 이미 재평가는 이루어졌다. 그의 음악이 그 증거다. 지금 들어도 여전히 새롭기만 한. 오래지만 새롭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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