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츄샤의 노래 - 김부자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잊어
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내드린
첫사랑 맺은 열매 익기 전에 떠났네
내가 지은 죄이기에 끌려가고 끌려가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파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사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기 전에 이 노래부터 들었다. 아마 주택복권 추첨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게스트로 강부자, 김추자와 이름도 비슷한 김부자가 가끔 출연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부자가 게스트로 나오면 항상 부르던 노래가 "얘야 시집가거라"와 이 노래 "카츄샤"였다.
당시에는 당연히 몰랐다. 노래 가사가 상당히 에러였다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원작이 아닌 톨스토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하여 국내에서 제작해 상영한 영화의 주제가로 만들어진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 시놉시스를 읽어 보니 상당히 노래 가사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0년에 제작된 첫번째 영화는 최무룡 김지미가, 1971년에 제작된 영화는 신성일, 문희가 주연을 맡았는데 신분의 차이로 인해 좌절하고 만 흔한 신파조의 사랑이야기로 재해석되어 있었다.
원곡은 당연히 먼저 제작된 1960년 최무룡 김지미가 주연한 영화에서 송민도가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송민도가 부른 버전을 찾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내가 송민도가 부른 원곡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나중에 송민도가 원곡을 부른 것을 알고 찾아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내게 있어 '카츄샤의 노래'는 김부자의 노래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송민도가 부른 노래가 훨씬 담백하고 절제된 것이 내 취향에는 맞다. 그러나 노래란 - 더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결국 서사로 듣게 되는 것이다. 서사란 기억이며 관계다.
아무튼 가사가 정말 어이없었다. 이런 엉터리 가사가 있는가. 노래를 먼저 듣고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다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방학숙제로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게 되었는데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츄샤? 말이 되는가?
물론 첫가사는 맞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첫사랑인 것도 맞다. 다만 그 마음대로가 폭력을 동반한 마음대로였다는 것이 문제다. 카츄샤는 한 마디로 도련님 네흘류도프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었다. 순진하던 처녀 카츄샤는 어느새 귀족사회의 모순에 물들어 타락한 네흘류도프에게 강간당하여 임신을 하고 끝내 일하던 귀족가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이내 죽어 버리고. 과연 카츄샤가 네흘류도프를 기다렸을까? 오히려 다시 재판정에서 만났을 때 카츄샤는 원망조차 없이 네흘류도프를 냉소하고 있었다. 그녀의 힘든 인생의 역정 속에 네흘류도프란 어떤 존재였을까.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카츄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역설적이게도 대학시절 채플 시간에 한 저명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였다. 목사는 말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타락한 카츄샤를 구원하려 했으나 카츄사는 그것을 거절하였다."
다른 부분보다 유독 '타락한'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카츄샤는 타락했을까? 그래서 네흘류도프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을까? 그럼에도 타락한 카츄샤는 그 구원을 거절했고. 그러면 네흘류도프에게는 카츄샤를 구원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마 채플이라는 게 그리 지겹고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로 가득 차 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때로 냉소 속에 생각을 넓힌다.
답은 그리 오래지 않아 내려지고 있었다. 과연 카츄샤는 타락했는가? 정확히는 타락했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타락되어졌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네흘류도프가 카츄샤에 대해 갖는 연민과 죄의식의 정체였다. 그의 원죄였다. 그가 카츄샤를 타락시켰다고 하는. 그로 인해 카츄샤는 매춘부가 되어 뭇남성을 전전하며 타락한 삶을 살아야 했고 마침내 살인자로서 법정에 서야 했다고 하는.
<부활>이란 사실 네흘류도프의 인간으로서의 부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의 죄로 인해 한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저질렀다. 그가 저지른 한 순간의 충돌으로 인해 한 인간의 삶이 피폐해지고 마침내 죄인이 되어 법정에까지 서게 되었다. 그는 그 순간 죄를 짓기 이전의 순수를 떠올리게 되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며 카츄샤를 통해 그 죄를 속죄하고자 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로열 패밀리>에서의 집사 엄기도가 김인숙에 대해 갖는 죄의식과 닮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 김인숙이 한지훈에게 갖는 연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톨스토이의 냉엄한 선언이 가해진다. 과연 누가 타락했는가? 누가 죄인인가? 카츄샤는 타락했는가? 카츄샤가 네흘류도프를 냉소하며 자신을 돕고자 하는 네흘류도프를 외면하고 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카츄샤는 타락한 적 없다. 그녀는 죄를 짓지도 않았다. 죄는 네흘류도프가 지은 것이다. 네흘류도프가 타락한 것이다. 단지 자신의 죄와 타락을 카츄샤에 덧씌우려 하고 있을 뿐. 그녀는 그녀의 삶에 충실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충실하고 있다. 그녀를 죄로 이르게 한 것은 단지 네흘류도프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와 타락, 그리고 죄일 것이다.
다른 여러 이야기들에서 매춘부라고 하는 직업이 갖는 이미지일 것이다. 여러 작품에서 매춘부라고 하는 직업이 등장하고 쓰이게 되는 코드다. 매춘부란 타락한 존재다. 정확히는 타락되어진 존재다. 그것은 인간이 갖는 원죄이기도 하다. 한 순진한 여성이 매춘이라고 하는 부도덕한 일로 내몰리고 타락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지겠는가? 그녀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하게끔 만드는 그녀들에게 돈을 주고 성을 사는 남성의 욕망과 그녀들로 하여금 그런 일로 자의, 혹은 타의로 빠져들게끔 만드는 신분질서와 빈부의 차이가 만드는 사회적인 모순과 부조리. 무엇보다 그녀들을 착취하며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만드는 포주를 비롯한 인간의 악의에 대해서까지.
심지어 근세까지 교회마저 동참하여 사창가를 운영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 이유인 즉 매춘이란 사회의 하수구와 같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주장된 이러한 논리는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매춘이 사라지면 성범죄가 만연하고 사회가 더욱 타락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하수구로써 매춘이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그것을 관리한다. 인간의 죄의 배설구인 셈이다. 희생양이다. 타락한 것은 그녀들 자신이 아니라 다름아넨 그녀들을 타락케 한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그래서 타락했으면서도 순수한 모순적 이미지가 가능한 것이다. 많은 작품들에서 매춘부란 가장 비천하고 부도덕한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오히려 가장 순수한 존재로써 묘사사되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때로 인간은 그러한 타락한 매춘부의 순수에 의해 구원을 얻기도 한다. 인간이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되어진 존재이기에 그 내면에 아직 순수가 남아 있다.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다. 주위에 의해 타락되었지만 마침내 카츄샤를 통해 순수를 되찾아가는 네흘류도프처럼. 죄를 마주함으로써 보로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로열 패밀리>에서의 김인숙이 비상하게 매춘부의 이미지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원래 그녀는 매춘부였을 것이다. 타락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에 의한 타락이 아니었다. 엄기도가 갖는 죄의식의 이유. 비록 공중파라는 한계상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녀가 갖는 원죄, 그녀가 놓인 타락, 그러나 그녀를 부여잡고 있는 죄의식, 순수, 그리고 구원... 하지만 역시 카츄샤와 같이 쿨하게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데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 실존적인 인간이었다. 내가 아는 한.
아무튼 노래에서 시작해서 소설까지, 그리고 한 목사의 설교에서 비롯된 매춘과 매춘으로 상징되는 타락과 죄의 의미, 그리고 구원, 최근의 <로열 패밀리>에서의 김인숙까지. 참 쓸데없이 생각은 고리에 고리를 물고 이어진다. 문득 오래전 기억속에 묻어두었던 이 노래를 꺼내 듣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했다. 마치 공명처럼 <로열 패밀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데 김인숙과 더불어 이 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좁은 십자가가 있는 방안에서. 마치 자궁과 같은 기도실에서. 물론 가사의 내용은 한참 거리가 있지만. 김인숙은 카츄샤가 아니었다. 차라리 네흘류도프였지. 한지훈도 카츄샤는 될 수 없었을 테고.
문득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고전이 갖는 향기일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올리고 나면 마치 자궁처럼 포근히 감싸안아 오는 그 심연. 톨스토이가 원래 의도한 바였을까? 내가 단지 오해한 것일까? 그 오해조차도 고전이 갖는 의미일 것이다. 노래도 역시.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다. 인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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