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나는 록의 전설이다 - 80년대 록의 부흥기와 그 한계...

까칠부 2011. 7. 9. 09:35

 

국민할매 김태원에 이어 백두산의 유현상, 로클롤대디 임재범까지... 2009년 본격적으로 예능을 통해 자신을 알리면서 김태원이 장담하던 일들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나를 알림으로써 부활을 알리게 되고, 부활을 알리면 시나위 백두산도 사람들이 알게 된다. 록을 알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번의 <MBC스페셜 - 나는 록의 전설이다>는 <나는 가수다>를 통해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 임재범의 역할이 가장 크다. 확실히 프로그램에서도 임재범의 비중이 가장 높다. 그 다음이 부활과 김태원.

 

하지만 좋지 않은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음악이란 당연히 록이어야 했고, 음악을 하자면 반드시 밴드여야 했다. 록이 아니면 음악이 아니었다. 지금 아이돌을 꿈꾸듯 많은 아이들이 록밴드를 꿈꾸었고, 실제 아이돌을 흉내내어 춤을 따라하듯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커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또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악기를 사기도 사실 버거운 아이들이 많았다.

 

그 시절 그 중심에 저들이 있었다. 3대 보컬 임재범과 김종서,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김성헌, 3대 기타리스트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 무엇보다 그들이 몸담고 있던 3대 밴드 부활과 시나위, 백두산. 여기에 H2O, 블랙신드롬, 카리스마, 외인부대, 작은하늘... 당대의 아이돌이었다. 부활만이 아니라 그들은 또래들에게 우상이었다. 모두가 본받고 싶어 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었다. 비록 아주 짧은 한여름밤의 꿈과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놀랐었다. 2008년 김태원이 예능에 처음 얼굴을 비쳤을 때. 설마 그 김태원인가? 김종서는 어느 정도 이해를 했다. 그는 대중가수였다. 하지만 김태원은 록커였다. 내가 들어 알고 있는 김태원은 결코 예능에 얼굴을 비추고 망가질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나는 가수다>에 임재범이 출연하기로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음반을 60만장이나 팔고서도 마음에 안 든다고 산속으로 떠나버린 그 임재범이 예능프로그램에 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세월은 그렇게나 지나 있었더란 것이다. 한때 우주에서 가장 기타를 잘 친다고 여기고 있던 신대철은 현재 시나위가 거의 해체된 상태에서 공식적인 음악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또래들의 우상이었던 그가 이제는 아는 이도 거의 없이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김도균의 17년된 낡은 소형차와 혼자 들어가 사먹던 김치볶음밥처럼.

 

하기는 오히려 기타를 연습할수록 괴롭다고 했었다. 더 이상 설 수 있는 무대가 사라지며 기타를 연습해도 들려줄 대상이 없다고. 괜하게 이름만 알려져서 돈 없다는 소리도 못하고. 팀의 유지마저 걱정하며 어느새 가족을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나이는 먹고 생활인으로써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데 자기 음악조차 건사하지 못한다. 잊혀진 채 말라간다. 아마 아내가 암에 걸려 절박한 처지가 아니었다면 임재범은 끝까지 록커로써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 않았을까.

 

잊혀졌으니까. 잊고 있었으니까. 김태원이 예능에 출연했을 때 놀랐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동안 잊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살아있구나. 아직도 부활이라는 팀이 유지되고 있구나. 신대철에 대해 찾아보고, 김도균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마침 그때 백두산도 재결성하고 있었다. 한 때의 우상이란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80년대 록의 전성기가 갖는 허상이었다. 신대철도 그래서 인터뷰에서 말한 바 있었다. 록의 부흥기라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한시적이고 지엽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바로 지금도 록이 한국의 대중음악에서 주변을 겉도는 이유일 것이다.

 

첫째는 역시 기악의 전통이 부족하다. 록은 근대 부르주아계급의 실내악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각자가 악기를 하나씩 배워 모여서 연주하며 즐긴다. 단지 그것이 노동자계급에게로 오면서 보다 대량생산에 유리한 전자악기와 보다 단순해진 멜로디를 대신한 강렬한 비트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제대로 정규음악교육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즉흥에서 만들어내는 거친 연주가 바로 록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가 중요하다. 그 악기를 다루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밴드를 이루고 함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종서도 말한다. 그렇게 밴드가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맞물려 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최고가 된다고. 그러나 기악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노래를 따라부르는 수준에서는 그런 연주의 완벽함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단지 노래와 그를 위한 반주만 있을 뿐. 반주는 노래방기기로도 충분하다.

 

더구나 둘째 정작 대중음악 시장에서 아티스트가 소외되어 있었다. 자본은 단지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았다. 대중은 단지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는 기능인으로만 여겼다. <나는 가수다> 논쟁에서도 나온 말이다. 대중가수란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따라서 대중이 판단하고 평가하여 순위를 매기는 것도 당연하다.

 

음반이 팔려도 가수에게 돌아가는 것은 없었다. 밤무대 열심히 뛰어 거기서 벌어야 한다. 대중이 직접 돈을 주고 티켓을 사서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행사장에서 돈을 받고 불려온 가수를 단지 감상할 뿐이다. 미디어 역시 아티스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서포트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미디어의 편의를 위해 아티스트가 희생하기를 바란다. 라이브는 그래서 꿈도 꾸지 못한다. 라이브가 가능한 실력이어도 차라리 MR을 틀고 핸드싱크나 립싱크를 하는 쪽이 편하다. 그렇다 보니 역시 밴드보다는 솔로가 유리하다.

 

밴드가 있으면 보컬만 따로 빼가서 솔로로 데뷔시키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차피 대중은 밴드가 있어도 보컬만 기억할 뿐이고, 미디어나 자본의 입장에서도 연주자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연주는 단지 음반을 녹음하는데나 필요할 뿐. 행사는 녹음한 MR만으로도 충분하다. 방송은 아예 AR로 해줄 수 있으면 그것이 더 좋다. 그런데 굳이 밴드가 필요할까? 록을 해도 솔로가수여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요인보다도 오히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록이 갖는 내면의 문제였다. 과연 한국의 사회는, 대중은 록을 내면화하고 있었는가?

 

록이 그렇게 단기간에 세계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그들의 언어였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회와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항. 기존의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부정. 60년대 학생운동의 확산은 그와 궤를 같이 하고 있었다. 우드스탁은 그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기성세대가 이루어 놓은 억압적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비판과 해방으로써.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록이란 단지 서구의 선진문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구의 보다 세련된 첨단의 문화였다. 그래서 그것을 주로 향유하는 것도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엘리트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었다. 미 8군무대와 대학가의 스쿨밴드가 한국록의 주된 생산지였다. 록의 소비 역시 그래서 80년대에도 보다 세련된 서구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일환으로써 어떤 우월감을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었다. 앞서도 말한 록이 아니면 음악도 아니다. 더 세고 더 강하고 더 대단한 것으로.

 

오히려 당시 한국사회에서 록의 갖는 반사회적인 역할을 하던 것은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던 운동권의 민중가요였다. 운동권의 저항의지를 대변하던 민중가요에 비하면 록이란 미국의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제국주의 문화에 불과했다. 오죽하면 학교 축제에서 록밴드가 연주하고 있는데 운동권에서 달려와 그것을 못하도록 막았다는 이야기까지 있겠는가. 상당히 살벌한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당시 스쿨밴드가 연주하는 록 역시 반사회나 반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상의 사랑이야기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멜로디 또한 통속가요를 단지 고고리듬에 실어 록사운드로 버무려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마저 듣고 있다.

 

그것이 문제였다. 록이 갖는 반문화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이 거세된 채 서구의 선진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경제적, 문화적인 성취감과 자신감의 상징으로써 소비되기 시작한 록이란 분명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록을 소비하던 그들이 이내 돌아서게 된 김완선과 소방차의 댄스음악이 그것이었다. 확실히 당시의 많은 록키드들에게는 록보다는 보다 더 화려하고 세련된 댄스음악이 그들의 취향에 맞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서태지가 등장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록을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을 느끼는 록마니아들. 그들은 과연 록을 내면화하여 록을 추앙하는 것일까? 아니면 록이라고 하는 기호를 통해 자신의 우월감을 표현하고 싶을 것일까? 그곳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 록을 듣는가? 아니면 록을 듣는 그 자체를 즐기는가? 장르에 사로잡힌다는 자체가 그같은 한계를 극명히 드러내는 것일 게다.

 

정작 전설들도 말하지 않는가. 다른 음악도 다 좋다. 단지 그 가운데 록이 가장 좋을 뿐이다. 설사 그로 인해 가난과 소외와 좌절을 겪게 되더라도. 바로 거기에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하다 보니 그것이 록이더라. 원래 록의 시작도 그랬다. 문득 하고 나서 보니 그것이 록이더라.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록의 몰락은 그런 점에서 정해진 수순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은 불필요한 연주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대중은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를 원했고, 미디어 또한 다루기 거추장스러운 밴드보다는 솔로가수가 더 편했다. 그래서 가수였다. 가창력이란 대중의 요구와 자본의 필요가 만들어낸 보편적 기준이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보다 어떻게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는가. '무엇'은 자본과 대중이 정한다.

 

스스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결정하지 못하는 밴드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밴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한 내면적인 교감도 없었다. 단지 그 외적인 형식에 매료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댄스음악은 그보다 더 화려하고 아이돌은 더구나 멋지기까지 한데 그저 껍데기 뿐인 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은 과도적인 현상으로써 잠시 록의 전성기가 왔을 뿐, 자본과 대중의 필요와 요구를 담아내는데는 가장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 아이돌인 것이다. 바로 아이돌인 이유다.

 

정말 짧았다. 1985년 들국화가 나왔고, 1986년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이 데뷔했다. 그리고 1987년 정점을 찍은 시나위와 부활, 백두산은 이내 1988년 시나위의 3집이 실패하고, 부활과 백두산이 차례로 해체되며 그 짧은 전성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고작 3년이나 갔을까? 짧고 화려한 꿈이었다. 대한민국 음악사에 유일했던 불꽃같던 시기였다. 정말 꿈만 같았던.

 

그리고 2011년. 김태원의 부활이 연인 매진을 기록하며 밴드로써는 꿈과 같은 연 100회 공연을 눈앞에 두고 있고, 임재범이 다시 돌아와 또다시 전설을 써내려가고 있다. YB역시 <나는 가수다>에서 한 손 거들고 있다. 여기에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서바이벌프로그램 <TOP밴드>까지. 이제 여기에 백두산이 살아나고 시나위까지 더해진다면.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인디씬에서 열심히 자기 음악을 하며 한국의 락씬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인디밴드들이 있다. 또 한 번의 전성기일까?

 

아무튼 의미깊은 기획이었다 생각한다. 추억을 돌아보았고, 전설을 일깨웠다. 아쉽다면 바로 그러한 현재진행형의 주역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지금도 인디씬에는 또다른 부활과 시나위, 백두산이 있다. 김도균, 김태원, 신대철도 있다. 김종서도. 임재범도. 단지 알지 못할 뿐.

 

바로 오늘 다시 <TOP밴드>를 기대하게 된다. 밴드의 역사와 그리고 밴드의 현재와 미래. <MBC스페셜>이 과거의 전설을 다루었다면 <TOP밴드>는 앞으로의 현재를 보여주리라. 행복한 꿈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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