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나가수' 스타일과 김수현 논란 - 대중권력과 획일화에 대해...

까칠부 2011. 11. 1. 18:07

필자는 <나는 가수다>를 보지 않는다.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보지 않게 되었다. 한 가지 사건이 계기였다. 필자가 무척 좋아하는 조관우에 대해 경연에서 낮은 성적을 거두었을 때 가해지던 어떤 폭력,

 

"그 음악스타일을 바꾸라!"

 

심지어 조관우더러 팔셰토 창법이 거슬리니 바꾸라는 의견마저 나오고 있었다. 필자가 조관우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바로 그 특유의 팔셰토 창법이었다. 나의 조관우를 부정한다. 그러나 조규찬이 일주일만에 탈락했을 때도 사람들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수다의 스타일에 맞추려 하지 않으니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자우림 역시 초반 비슷한 비판을 듣고 있었다. <나는 가수다>에는 <나는 가수다>의 스타일이 있는데 너무 자우림만의 스타일을 고집한다. 그래서 음악인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반드시 청중평가단의 취향에 들기 위해 그 스타일을 바꾸어야 하는가?

 

물론 인정한다. <나는 가수다>에는 <나는 가수다>에 맞는 스타일이 있다. <위대한 탄생>에는 <위대한 탄생>의 스타일이, <슈퍼스타K>에는 <슈퍼스타K>의 스타일이 있다. 그와 맞으면 살아남는 것이고 아니면 떨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대로 떨어지면 되는 것이다. 최소 10년 이상 음악을 해 온 가수들이기에 그와 스타일이 맞지 않으면 떨어져 사라지면 그 뿐이다. 그러나 굳이 살아남기 위해 바꾸라 요구한다. 이제까지 해 온 음악을 부정하라고. 그것은 음악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설사 스타일을 바꾸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인으로서의 자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악을 소비해주는 대중이다. 언제부터인가 마치 당연한 사실처럼 회자되는 말이다. 손님은 왕이다. 대중이 그들의 음악을 들어주는 이상 그들의 음악을 평가하는 것도, 서열을 매기는 것도, 그들에게 음악적 변신을 요구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를 따르지 못하면 오만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조규찬은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나는 가수다>에 대한 고민이나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대로도 좋은가? 그것은 조규찬이라는 가수에 대한 신뢰와 애정, 무엇보다 존경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에 출연하는 가수들 가운데 과연 존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가수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거의가 기본적으로 10년 이상 음악을 해 온 사람들이고, 그들이 지닌 역량이나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력은 무어라 말로 한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말한다. 대중이 바란다면 따라야 한다.

 

아마 이번 <천일의 사랑>의 작가 김수현과 관련한 논란의 근본적 이유일 것이다. 대중이란 드라마를 봐 주는 시청자다. 대중이 드라마를 봐 주기에 드라마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배우와 제작진, 작가에 막대한 이익을 안긴다. 그렇다면 당연히 대중이 바란다면 최소한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대중이 거슬린다면 바꿔야 할 것이고, 바꾸지 못하더라도 바꾸는 흉내는 내야 한다. 그것이 대중에 대한 예의다. 데뷔 43년차 작가한테. 필자의 나이보다도 오래되었다.

 

문득 루이 14세가 예술가들에 공작의 작위를 남발하며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공작의 작위 따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지만 예술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인구 4천 만이 모여봐야 김수현이 쓰는 드라마 한 편을 써내기 힘들다. 인구 4천 만 가운데 단 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관우다. 단 하나의 팀이기 때문에 자우림이다. 조규찬과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조규찬 한 사람 뿐이다. 바로 그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들의 음악을 듣는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대중은 그들의 음악을 듣고 울고 웃으며 때로 시비도 걸 수 있다. 일방저으로 대중이 그들의 작품을 소비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있기에 자신의 귀한 시간과 돈과 노력을 소모해가며 그들의 작품을 소비한다. 대중은 항상 그들에 갑인가?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은 문화예술에 대한 뿌리깊은 천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니다. 결국 가장 근본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인간경시에서 그 근원을 찾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항상 말한다.

 

"고작 그런 일을 하면서..."

 

컴퓨터 윈도우도 제대로 못 까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기사를 불렀다. 기사가 잠시 컴퓨터를 보고는 문제를 해결하고 출장비를 요구한다. 바로 인터넷에 올라온다.

 

"고작 그런 정도 하면서 돈을 얼마를 요구하더라."

 

분명 그 사람은 컴퓨터에 대해 문외한이기에 전문가인 기사를 불렀던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댓가를 지불할 때가 되어서는 생각이 바뀐다. 고작 이런 정도를 가지고서 그만한 댓가를 요구하는가? 만일 기사가 와서 고쳐주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겪어야 했을 불편함이나 손해는 안중에 없다. 자기가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자기가 할 수 있다면 그까짓 일이지만 자기가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충분한 댓가를 치러도 좋다. 그런데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거의가 그까짓 일이다. 모든 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높은 임금을 받는다. 그렇게 여긴다. 아니더라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더 값싸게 일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노동자가 너무 높은 임금을 받으면 귀족 소리를 듣는다. 그 너무 높은 임금이란 20년 근속에 각종 수당 포함 5천만원 이상이다. 너무나 가혹한 드라마제작환경에 배우가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도 버는 돈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그가 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작가가 하는 일이란 게 별 것 있는가? 누구나 할 줄 아는 글 쓰는 일이다. 물론 그 자신이 김수현과 같은 글을 쓸 수 있는가는 별개다. 그런 것을 대중이 소비해 주는데 대중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오만한 것이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고작해야 그런 일을 하면서.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멸시다. 그가 가진 능력이나 개성, 그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무시다. 늘 그런 것처럼.

 

황당한 것이다. 가요계에는 어차피 김범수도 있고, 임재범도 있고, 조관우도 있다. 알리도 있고, 임정희도 있고, 카라도 있고, 소녀시대도 있다. 굳이 카라가 소녀시대가 될 이유도 없고, 소녀시대가 임재범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없다. 소녀시대가 좋으면 소녀시대를 듣는 것이고, 소녀시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음악을 찾아 들으면 된다. 그것이 다양성이다. 호불호는 있을 수 있지만 그 존재 자체는 인정하는 것. 아마추어라면 어느 정도 교정이나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데뷔한지도 오랜 프로라면 그 전문성이나 고유의 영역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조차도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에 맞추기를 요구한다. 획일화다. 그까짓 것. 고작해야 그런 정도.

 

바로 <나는 가수다> 스타일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청중평가단의 어떤 보편적 취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출연가수들의 생존을 결정하다 보니 그것이 어떤 절대적 규준이 되어 버린다. 그를 추구하면 살아남고, 그를 거스르면 도태된다. 자연스럽게 가수들 자신도 그에 맞춰가고, 대중 역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대중음악에 다양성을 높여보고자 기획된 프로그램이 오히려 대중음악을 획일화시킨다. 그래서 김수현의 대사가 싫다고 김수현이 김수현의 대사를 버리게 되면 그는 더 이상 김수현일까? 김수현의 스타일이 사라지는 순간 드라마에서도 김수현이라고 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획일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오만하고 무례한 말이었다. 더구나 데뷔 43년차 원로작가에 하는 말로서는 더욱. 43년의 작품생활을 통해 다듬어지고 완성된 스타일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바꾸라 강요한다. 그렇다면 해 줄 말은 한 마디밖에 없다. 다른 드라마도 많으니 김수현의 대사가 거슬리면 그것을 보면 된다. 카라가 싫으면 티아라도 있고, 티아라도 싫으면 씨스타가 있다. 임재범이 싫으면 이승철을 들어도 되고, 이승철마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신승훈도 있다. 굳이 원로작가더러 그 스타일을 바꾸라 하지 않고도 볼 수 있는 드라마는 많다. 그래서 결국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면 스스로 바꾸거나 아니면 완전 도태되면 그 뿐이다. 냉정한 경쟁의 원칙이다. 그리고 그러한 냉정함 속에 다양성은 존재한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옳다. 바꾸더라도 그러한 자율과 다양성 안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여 바꾼다. 작가로서의 존엄이다.

 

어쩌면 한국사회 특유의 무한경쟁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닐까? 따뜻한 경쟁. 다른 말로 오지랖이다. 그저 내버려두고 그 가운데 좋은 것만 선택하면 좋을 것을 굳이 안 좋은 것을 찾아 좋아질 것을 강요한다. 같은 경쟁사회라도 오히려 미국은 다양성이 풍부한데 한국사회에서는 그것이 획일성으로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드라마를 보다가 대사가 거슬리면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굳이 작가를 찾아가 요구한다. 바꿔달라고. 비평과 요구는 다른 것이다. 평가는 내릴 수 있어도 작품 자체에 대해 건드리는 것은 월권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노래와 가수들이 있다. 드라마도 많고 작가도 많다. 굳이 어떤 특정한 개인일 필요는 없다. 어떤 특정한 작품일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할 일을 하고 대중은 그 가운데 선택해 듣는다. 더 많은 사람이 좋다고 판단한다면 그는 스타가 될 것이고, 충분한 사람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그는 도태될 것이다. 다양성 가운데 경쟁을 한다. 획일화된 한 가지 스타일을 가지고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하나하나가 가치이며 가능성이다. 독립적이다. 나아가 컴퓨터를 조립해서 파는 사람이 있기에 굳이 내가 컴퓨터를 조립하지 않고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컴퓨터를 스스로 조립하는 사람이 공짜로 한다고 자기마저 공짜로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지식과 기술은 특별하고 고유한 가치를 갖는다. 충분히 존중하고 존경할 가치가 있다.

 

김수현의 다른 작품에 대한 입장은 별개로 따져야 할 것이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과거 어떤 이야기들을 했었는가? 그러나 그렇더라도 김수현이 그 작가들더러 스타일을 바꾸라 말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단지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을 지적했고, 때로 그 표현이 지나쳤을 뿐이다. 물론 필자도 때로 김수현의 작품에 그와 같은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허용의 영역이다. 그러나 작가의 정체성이라 할 스타일을 바꾸라는 요구는 전혀 다른 것이다.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여러가지 문제가 보인다. 특히 그 가운데 유독 겹쳐 보이는 것이 이른바 '나가수 스타일'이라 불리우는 어떤 획일성이었다. 어째서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는가? 모든 문제는 씨줄과 날줄처럼 그렇게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나타난다.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두는 하나로 통하고 마는 것이다. 원로라 할 만한 작가에게마저 태연히 가해지는 폭력은 대중이라는 권력을 깨닫게 한다. 그 주체들에 대해서마저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고 사회였다.

 

차라리 욕하고 비난하라. 경멸하고 조롱하라. 형편없다고. 쓰레기라고. 볼 가치가 없다고. 그것은 평가로서 유효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바꾸라. 아마추어도 아니다. 초보자도 아니다. 원로다. 그렇게 오만하다. 인간에 대한 오만일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다. 한숨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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