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불과 얼마전까지 흔하디 흔한 락덕이었다. 락과 그리고 블루스, 가끔은 R&B... 느낌이 있는 음악이 좋았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락보컬을 대표하는 양 하던 김종서나 김경호 스타일은 별로였다. 역시 김바다. 영혼의 저 바닥까지 헤집는 듯한 그 음울한 전율이란...
당연히 처음에는 아이돌이라면 우습게 여겼었다. 철모르던 시절에조차 이지연을 좋아하고 김완선에 열광하면서도 아닌 척 그리 허세를 부렸더라는 것이다. 90년대 아이돌 열풍에서도 한 발, 아니 서너 발은 비껴 서 있었다. SES? 뭐하는 애들인지도 몰랐다. 핑클? 이효리만 겨우 알아봤다. 그러나 베이비복스...
솔직히 베이비복스는 처음에는 전혀 눈에 안 들어왔었다. 1집은 나왔는지도 몰랐고, 2집에서는 핑클을 넘어서는 과도한 귀여운척으로 나에게 비호감으로 찍혔었다. 그런데... 3집의 Killer. 특히 파워풀한 보컬과 무대매너로 단숨에 나를 매료시켰던 심은진. 참고로 그 눈쳐진 애가 심은진이라는 사실은 작년에야 처음 알았다. 역시나 그때까지도 허세가 남아 있던 터라.
내 허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베이비복스가 투팩의 음악을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이하늘이 그것을 미아리복스라 비하한 것에 대해 은연중 동의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아이돌은 아이돌일 뿐이라... 그래서 아무래도 힙합을 한다면 존경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기본도 안된 아이돌들이 어쩌고... 뭐 그게 베이비복스와 안전 단절하게 된 이유였지만. 그 이후로는 윤은혜 드라마 출연하고서야 해체한 줄 알았었다.
그리고 다시 2007년, 텔미가 나왔다. 소희가 귀엽더라. 넘어갔다. 소녀시대가 소녀시대를 부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는 누가 누군지도 몰랐고 - 다 똑같이 보였다. - 재작년 말 태연이 라디오스타에 나온 걸 보면서 태연부터 시작, 당시 머리가 길었던 수영, 제시카 순으로 알아갔다. 그러나 그것도 패스. 그리고 얻어걸린 게 카라... 박규리와 구하라.
이건 뭐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아무리 허세쩔어도 좋은건 그냥 좋은 거니까. 물론 그 근간에는 베이비복스가 있을 것이다. 베이비복스만의 무대와 매력에 빠져들면서 음악이라는 게 굳이 어깨에 힘을 주고 들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 알게 되었으니. 보는 음악도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냥 좋으면 좋은대로 듣고 즐기는 문화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더 자유로워졌다. 음악이란 머리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거라는 걸 알았달까? 지식이 아닌 감성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머리로 알아서가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해서가 아니라, 어느새 내 감성이 그렇게 시키더라는 것이다.
"이건 좋다!"
그러고 나면 끝난 거지. 이미 가슴에서 좋다고 명령을 내렸는데 머리로 거부하나? 예전이라면 머리가 한창 컸을 때니 그럴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머리 자체가 텅 비어버려서 그런 것 없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은대로 좋아하면 되는 거고 싫어하면 싫어하는대로 좋은 거고.
아마 지금의 걸그룹열풍도 거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남자란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동물이거든. 그래서 주위를 자주 의식하고 허세도 부린다. 그래서 예전에는 걸그룹이 좋아도 그걸 그렇게 내색을 안했다. 내가 노래방에서 베이비복스 노래 부르고 있으니까 미친 놈 취급하더라.--;;;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 없잖은가? 그냥 좋으면 좋은대로, 아직까지는 서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에 솔직하게.
내가 걸그룹열풍이 꽤 오래 갈 것이라 예감하는 것도 그래서다. 보이밴드가 그래서 HOT가 해체되었다고 완전히 사라졌었던가? 새로운 보이밴드가 나왔고 그에 따라 새로운 팬덤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걸그룹 역시 남성팬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며 다양한 스타일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며 성장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 카라와 티아라 정도? 원래는 티아라도 카라와는 약간 영역이 갈렸는데 보핍보핍에서 상당부분 겹치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외에는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애매할 정도로 걸그룹 자체가 다양해졌고 다양한 취향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남성팬들의 수줍음이나 허세도 많이 사라져 보다 솔직해질 수 있었고. 과거 미아리복스 운운하던 이하늘조차 걸그룹에 저리 열광하는 것 보라.
즉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들의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거 뭔가 가치있는 음악을 들어야 뭔가 있어 보였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그런 허세 없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졌다. 예쁘면 좋다. 귀여우면 좋다. 그래서 듣기 좋으면 좋다. 또 걸그룹에 열광하는 남자팬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과거 락이며 블루스며 허세쩔며 음악 듣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거다.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가 활동하던 1세대와는 다르다. 가끔 섣부른 예측을 하는 것을 보면...
아무튼 원래 음악이라는 게 그런 거다. 돌이켜 보라. 과거 어떻게 락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던가? 힙합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어떻게 열광하게 되었던가? 발라드에 빠져들었던 것은? 때로 블루스나 재즈의 심오함에 매료되었던 것은? 머리가 시켜서였을까? 이성이 그리 하라 해서였을까?
지금도 기억한다. 라디오에서 들국화의 행진이 들려오던 그 때를. 마치 세상이 다시 열리는 것 같았다. 행진과 그것만이 내세상, 그리고 시나위의 크게 라디오를 켜고. 새가 되어 가리. 비와 당신의 이야기. 80년대의 끝을 장식하던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곡. 그냥 가슴을 때렸던 것이다. 내가 아직까지도 힙합에 대해 별 느낌이 없는 것도 그때 그 영혼을 후려치는 듯 하던 그런 감동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
지금의 걸그룹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좋더라는 거다. 그건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솔직한 감정이다. 예전에는 그리 우습게만 보이던 걸그룹의 음악이 좋고, 어린애들일 뿐이라 관심도 안 두던 아이돌들에 자꾸 눈이 가고, 예전같으면 욕부터 내뱉었을 서툰 노래조차 귀엽게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더구나 어느새 자기 자신에게 더 솔직할 수 있게 되었고.
물론 그러면서도 많은 걸그룹 마니아들은 다른 음악들을 소비한다. 해외의 락밴드라든가, 혹은 블루스, R&B,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국내외 여러 뮤지션들의 다양한 음악들이 튀어나온다. 멀리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심지어 제 3세계의 알려지지 않은 음악들까지도. 단지 집중도에서 걸그룹에 미치지 못할 뿐. 일단 그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고 걸그룹이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니까. 슬금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시기랄까?
어떤 사람들이 지금의 걸그룹 열풍에 대해 과도하다 지적하는 시각은 나도 인정한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음악이란 가슴으로 듣는 것이다. 나의 감성으로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과연 아이돌 걸그룹이 문제인가...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좋은 것을? 그걸 부정할까? 그걸 누가? 어떻게?
받아들일 때다. 이런 취향도 있음을.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걸그룹에 열광하는 아저씨들도 결국에는 과거 여러 다양한 음악을 즐기던 마니아들인 것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이 나올 수 있다면... 하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워낙에 한국의 대중음악이라는 것이 찾아가서 듣는 것이 아닌 앉아서 받아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은 분명 있지만... 그 또한 대중음악이라는 것이다. 찾아가서 들을만한 음악... 그 역시 대중음악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고.
아마도 조정을 위한 과도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걸그룹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걸그룹 자체가 수명을 다한다는 게 아니라 걸그룹만으로 충족하지 못하는 취향에 대한 요구가 있을 것이라는 거다. 지금도 그래서 타이거JK나 리쌍, 김태우 등 아이돌음악과는 차별된 음악들이 그 틈을 메워주고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이며 브로콜리 너마저, 검정치마 같은 인디밴드들도 알게모르게 은연중 선전하고 있었고. 오히려 주류음악시장과 인디음악시장의 격차가 전보다 더 좁혀졌달까? 그만큼 취향이 다양해지고 다양해진 만큼 솔직해졌다는 뜻일 게다. 그것은 장차 한국 대중음악이 나아갈 바일 테고.
섣부른 예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한국대중음악시장은 다양한 취향과 음악적 깊이를 충족시키는 대중음악과 주로 보고 즐기며 감성적인 만족을 즐기는 걸그룹과 보이밴드로 대표되는 아이돌음악으로 이원화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둘은 둘이지만 하나다. 귀로는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아이돌을 보고, 가슴에는 음악이 주는 감동과 아이돌이 주는 기쁨을 함께 누리며. 물론 대중음악 종사자들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해결해가야 할 문제일 테지만 말이다. 말했듯 한국 대중은 무책임하고 게으른데다 오만하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말은 가르치려 해서 될 게 아니라는 거다. 머리가 시켜서가 아니라 가슴이 시켜서 하는 거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사람들에게 머리가 시키는 명령이란 때로 부질없다.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 그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몇 마디 말이 아니라. 그저 윽박지르고 야단치려 할 게 아니라.
참 생각해 보면 이 블로그 만들 때만 해도 걸그룹 얘기로 절반을 넘게 채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그러나 덕분에 그 걸그룹 얘기로 방문자수도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때로 그게 싫어서 아예 쓰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지만 그조차도 안된다는 게... 가슴이 시키면 머리는 따를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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