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신 - 사람을 죽이는 최충헌의 정치, 정치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까칠부 2012. 3. 25. 08:55

그런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역사따위 상관없다. 실제의 역사가 어떠했던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시청자가 재미있어할까 그 한 가지만을 생각한다. 그 한 가지만을 고민하며 모든 것응 상상에만 의지해 창작하고 재구성한다. 김준이 그렇고 격구가 그렇다. 황제니 막부니 하는 호칭들도 그렇다. 그렇다면 어째서 허구의 드라마에서 연호는 쓰지 않는 것일까?


사실 몽골의 사신들이 굳이 고려까지 와서 누가 황제입네 다쿨 이유란 없었다. 몽골에는 대칸이 있었다. 대칸이 곧 황제였다. 아니 중국의 황제보다 더 높은 것이 바로 초원의 대칸이었다. 그래서 청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청의 황제들은 중원의 수명천자와 더불어 몽골의 대칸의 지위를 세습하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대원을 세우고 중국으로 들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초원의 지배자들은 칸이라 불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황제라 불러야 할까?


고려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고려가 외왕내제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제라는 것이 스스로 왕을 황제라 불렀다는 뜻이 아니다. 예법이나 격식이 황제의 그것에 준해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세자가 아닌 태자이고 대비가 아닌 태후다. 다만 그럼에도 국제적으로는 외교적인 이유로 인해 왕으로 자신을 낮추었다. 고려의 왕은 고려 안에서는 황제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외교적인 여러 이유로 인해 한 단게 낮춰 왕을 칭한다. 그것을 가장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연호다.


북송과 요가 서로 대립할 때 요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누구의 연호를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명이 멸망했는데 조선조정은 여전히 청을 상국으로 섬기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명의 연호를 따름으로써 청에 대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서기란 크리스트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서구의 연호다. 이슬람은 헤지라를 쓴다. 일본의 천황들은 자신의 즉위를 연도를 헤아리는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헤이세이 3년이란 헤이세이 천황이 즉위하고부터 3년째 되는 해, 조선조정에서 쓰이는 공문임에도 명나라 황제가 즉위한 해로부터 얼마나 지났는가를 기준으로 쓴다. 그것이 연호다 한 마디로 시간을 헤아리는 표준이다. 무엇을 기준으로 시간을 헤아리는가. 그런데 정작 황제를 칭하며 그것으로 사신과 다투면서도 정작 고려에 연호는 없어 보인다. 어째서?


김인준이 김준이 되어 버렸다. 격구가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것이 되어 버렸다. 고려에서 무신정권을 막부라 부른다. 스스로 몽골의 사신에게 고려의 왕을 황제라 부르며 다투기까지 한다면 연호 하나쯤 만들어 넣는 것이 무에 문제란 말인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는 드라마로서만 보면 된다. 연호의 의미를 몰랐던 것일까? 황제란 칭호를 쓰지 않았다면 모르겠는데 황제란 원래 중국에서 만들어진 고유한 개념이었다. 연호란 그 일환이었다. 고증의 문제였을까? 몽골과의 항쟁을 앞두고 몽골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고자 몽골사신의 무례를 강조해 보여줄 성의라면 연호 정도는 만들어서라도 넣어주는 것이 옳다. 설마 서기를 쓰겠는가?


아무튼 드라마가 결국은 무협드라마로 노선을 바꾸려는 모양이다. 이제껏 격구를 빙자한 노예검투를 보여주더니만 이제 김준(김주혁 분)의 형편이 나아지니 항상 그래왔던대로 쉬운 무협으로 드라마의 방향을 정하려 한다. 소림사도 아니고 흥왕사의 장경각에서 만든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무술서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익히려 하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무술을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흥왕사의 승려들이 일으킨 봉기는 처참히 실패하고 만 것인가?


하여튼 이 또한 드라마 특유의 리얼리티의 하나일 것이다. 원래 중국무술의 많은 유파들이 그 기원을 아주 멀리서 찾는다. 이정이며 악비와 같은 역사상의 유명한 인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소설 수호전 속에 등장하는 이충이나 연청과 같은 인물들마저 곧잘 그 이름이 보인다. 승려나 도사 같은 어쩐지 신비해 보이는 인물 또한 무술의 시조나 관련한 인물로써 곧잘 쓰이는 대상들이다. 만든지 얼마 안 된 새책에 단군까지 기원이 거슬러올라가는 거창한 서문, 그런데 정작 무술의 이름은 수박이다. 수박이란 원래 중국의 문헌에도 나타나는 이름으로 단순히 맨손무술을 일컫는 일반명사로서 쓰이고 있었다. 그것을 진지하게 읽고 있는 김준이 안쓰러우면서도 우습다.


과연 어째서 고려는 고작해야 거란군의 패잔병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3년이라는 시간을 질질끌고 있었는가? 몽골이 고려에 고압적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고려의 조정이 어찌하지 못하고 3년이나 끌고 있던 거란의 잔당을 몽골과 몽골에 복속된 동진의 병사 3만이 한 순간에 제압하고 있었다. 비세를 보인 것이다. 금이 송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계기가 송과 더불어 요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송의 비세를 보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고려조정의 무능함이 몽골 사신들의 오만을 불러왔다. 그러면 과연 무신들이 집권한 고려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었는가?


도방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최우(정보석 분)를 제거하고자 개경 밖에 집결시킨 병력이 2만이었다. 각종 사병까지 동원하면 무려 3만이라는 병력이 강동성에서 싸움이 막 끝난 시점에 최우와 최향(정성모 분)의 권력다툼을 위해 동원되고 있었다. 그것도 최향쪽 병력만 해서 그렇다. 과연 그만한 병력이 일찌감치 거란과의 전선에 투입되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무력이란 자체가 곧 권력과 직결되기에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서라도, 손에 쥔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 몽골의 위협이 현실화되는 순간에도 그래서 그들은 권력을 위해 사사로이 무력을 동원한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정치화된 군인이 갖는 폐해를 그대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최양백(박상민 분)이 굳이 춘심(김하은 분)의 진심을 외면하려 드는 이유일 것이다. 수법(강신일 분)이 말한다. 노비인 김준과 월아(홍아름 분)가 자식을 낳으면 그 또한 노비가 될 뿐이라고. 잔인한 운명은 반복될 뿐이라고. 과연 노비라고 하는 신분의 비참함을 아는 노비 최양백의 입장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에게 노비의 운명을 물려주는 것이 달가운 일일까? 차라리 자기 대에서 그 억울함과 고통을 끝내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최양백을 바라고 김준을 바라는 춘심과 월아야 말로 수법이 말하는 마구니 그 자체일 것이다. 사람의 정이 오히려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오히려 수법은 무정하다. 최양백의 무정함과도 닮아 있다. 정을 끊음으로써 더 큰 아픔을 막는다. 정을 끊음으로써 더 큰 비극을 예방한다. 자연스레 월아의 다정함이 비극을 불러일으킬 것을 예감케 한다. 김준도 다정하고 만종(김혁 분)도 다정하다. 최송이(김규리 분) 또한 다정해서 상처를 입는다. 상처가 덧나며 독기를 피워된다. 정이 비극을 잉태한다. 


만종은 어느 정도 동정의 여지가 있다. 의외로 드라마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공감가도록 디테일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 만종과 만전형제다. 첩의 자식이다. 아비는 고귀하지만 자식은 비천하다. 차라리 아예 비천하게 태어났으면 포기라도 하련만 아무도 대우해주지 않는 비참함이 더욱 그들을 자삭하고 자괴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아비가 정을 주었을까? 집안의 누군가 그들을 존중하고 위해주었을까? 월아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와도 같은 집착은 그같은 정을 모르는 아이의 간절함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무모하다. 정을 모르는 이의 사랑은 정도를 모른다. 자제를 모른다.


최충헌의 말에는 항상 모순이 있다. 그를 진심으로 경멸케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게 정치가 아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죄다 내쫓고 죽이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그것이 일방적이라면 그것은 단지 무도한 폭력에 불과하다. 대화하고 양보하고 타협하여 서로 공존할 수 있는 합의점을 구하는 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를 잘하면 그래서 서로 죽일 일이란 없다. 저 하고 싶은대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는 이제 와서 그것이 정치라서 어쩔 수 없었다. 혜심이 선승은 선승이다. 그것을 보고도 웃는다. 도가 통하다 보니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조차 없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화엄종은 교종이다. 흥왕사는 왕실불교 사찰이다. 수기가 바로 화엄종으로 드라마에서 흥왕사에 머무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조계종은 바로 그같은 고려불교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혜심은 바로 그 조계종의 승려다. 과연 수기와 혜심이 서로 친할 수 있을까? 같은 불교가 아니다. 불교 안에서도 종파가 있고 교종과 선종은 매우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워오고 있었다. 조계종의 출발도 천태종으로의 일방적은 통합에 대해 반대한 일부 선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하기는 수기가 팔만대장경을 모두 감수하는 것이 30년도 더 뒤인 1251년의 일인데 지금의 수기는 그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인가.


허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미 최향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어찌 최우를 치지 못할까? 최충헌이 그렇게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김준 역시 이후 최의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모아 급습하여 최의를 죽이고 있었다. 도방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만한 군사적 우위라면 이런저런 계산 엇이 힘으로 들이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너무 생각이 많다. 최우가 도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최향은 그를 죽이지 못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허술하다.


과연 최송이는 지금 이 순간의 자신도 모르는 격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월아의 지극은 예고되어 있다. 현실은 잔혹한데 월아는 너무 순수하다. 친구의 딸이라 위해준다면서 결국 그녀를 노비에서 풀어줄 생각은 않는다. 그녀의 짝도 같은 노비다. 최우의 아내 정씨부인의 모순조차 선량한 배려로 보인다. 만종이 만들 비극이 애닲다. 김준은 무색무취하다. 항상 아쉽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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