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신 - 문무겸전의 김준과 들러리로 전락한 인물들...

까칠부 2012. 3. 26. 13:23

확실히 스파르타쿠스와 <무신>의 김준(김주혁 분)은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비록 검투노예로 전락해 있었지만 마침내 자유를 위해 노예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김준은 자신을 노예로 만든 최우(정보석 분)에게 충성하며 출세하려 한다. 만적과 더불어 부당한 신분질서를 뒤집으려 했던 그의 아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비록 노비의 신분이기는 했지만 김준은 얼마전까지 무상이라는 법명까지 받은 승려였다. 수법(강신일 분) 이하 충령사의 승려들은 그의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를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으로서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노비가 되었다. 자유를 빼앗기고 존엄을 희롱항하고 있다. 과연 인간이었던 이가 노예라고 하는 굴종된 삶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당시 김준의 나이는 최소 22세 이상이다.


어째서 일본의 전국을 통일한 에도막부에서 무사들에게 다도와 성리학을 가르치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전국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무사들에게 있어 주군이란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창을 거꾸로들고 배신할 수 있는, 이익으로 엮인 관계였다. 그러나 에도시대를 거치며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무사도라는 것이 만들어진다. 무사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주군에 대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도는 무사들의 난폭한 성정을 다스리고 성리학은 의리와 명분으로써 군신간의 관계를 절대화한다.


너무 아는 것이 많다. 배운 것도 많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아는 것이 많으면 체제에 순응적이기 싫다. 어떻게 어떤 논리로써 세상은 움직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안다. 어차피 고려에는 노비가 있고, 그러면서도 최씨정권 아래에서 노비초자 최씨정권의 가병이자 가신으로서 위세를 부릴 수 있다. 노비가 노비인 이유를 안다. 최우가 최우인 이유를 안다. 기왕에 노비가 되었다. 받아들인다. 노비가 되어 가신이 되었으니 최우는 주군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원래 노비란 주종관계에 있지 군신관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일본의 무사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군신관계란 쌍무적이다. 반면 주종관계란 일방적이다. 주종관계에서는 단지 일방적인 복종만이 존재할 뿐이지만 군신관계에서는 건의와 헌책 등 쌍무적인 관계가 중시된다. 김준이 노비로 있자면 그를 주인이라 불러야 했을 테고, 신하로 있고자 했다면 먼저 신분부터 풀었을 것이다. 그는 노비로 있으면서 선비이고자 한다. 안타깝다.


아무튼 유교문화의 영향일 것이다. 원래 전통사회에서 무인이란 그다지 학문적으로 뛰어날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이순신으로 인한 부작용일 테지만, 덕분에 우리나라의 이야기속에서 영웅이란 선비의 모습을 띄고 있다. 최우를 주군이라 부르며 목숨을 내던지고, 최우의 포상을 개가 되기 싫다 당당히 거절한다. 박송비(김영필 분)에게는 최우를 위한 계책을 낸다. 어째서 우리나라에서는 남자란 모름지기 제 이름자만 쓸 줄 알면 된다는 항우와 같은 무장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머리를 굴려 싸움을 하기보다 본능적으로 때를 알아 위기에서 공을 세운다.


그나마 최우는 조금 낫다. 이미 그의 아버지가 진양공 최충헌이었다. 무신정권의 최고집권자였다. 권력자와 군인과 무사의 싸움방법은 또 서로 다르다. 그런 점에서 동생인 최향(정성모 분) 역시 이미 군사적은 우위를 차지하고서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꾸 때를 놓친다. 최충헌의 자식들에 대한 가르침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무신이 세운 정권이고 최충헌 또한 그 계승자이면서 자신의 자식들은 사대부가 되기를 바랐다. 만일 최충헌이 최향의 처지였다면 먼저 최우를 죽이고 나중에 명분을 꾸미든 했을 테지만 최향은 결코 최충헌이 아니었다. 최우 역시 선승인 혜심에게 배운 사람답게 느리고 둔하다.


하여튼 어째서 우리나라에는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조차 박학다식한가? 제자백가의 경전을 꿰고 천하를 경영할 지혜를 두루 갖추고 있다. 무사이면서 책사다. 선비이면서 정치인이다. 김준이 굳이 장경각에서 경전을 찾아 읽는 모습에서 그같은 아쉬움을 느낀다. 많이 알아야 한다. 많이 배워야 한다. 그 지식이야 말로 선비의 힘이다.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이 세계를 지배한다. 무의 폭력과 지식의 힘을 두루 갖춘다. 굳이 그러지 않고서는 김준의 캐릭터를 묘사하지 못햇을까?


어쨌거나 최양백(박상민 분)의 고백이 상당히 뜬금없다. 과연 그 상황에서 최양백이 월아(홍아름 분)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아야 할 개연성이란 어디에 있겠는가? 김준과 결혼하려 한다는데 굳이 그 앞에서 자신이 월아를 좋아했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것을 하필 최양백을 좋아하던 춘심(김하은 분)이 듣는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춘심이 장차 월아가 겪게 될 비극에도 한 몫 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부분 아니었던가 말이다.


만종(김혁 분)과 만전(박도빈 분) 형제의 비극에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된다. 항상 뜻을 바로하여 계획을 세우고 평생의 일을 도모하여야 한다. 인무원려필유근우(人無遠慮必有近憂)라는 귀절을 듣는데 어쩐지 만종이나 만전이나 잔뜩 상처입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명색만 최우의 아들일 뿐 천한 창기출신을 어미로 두고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들에게 멀리 내다보고 도모하여야 할 평생이란 무엇이 있을까? 아버지인 최우마저 그들을 무시하고 돌아보지 않는다. 아버지의 위기에 겁먹고 도망부터치는 그들의 모습을 누가 만들었을까?


만종이 월아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처음으로 진심이 될 수 있었던 누군가이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희한하게 만종과 만전의 부분에서만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디테일을 보여준다. 모두가 평면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는 가운데 이들만이 복잡한 내면을 표정과 행동으로서 보여준다. 주인공인 김준조차 그다지 고민이 없어 보인다. 많이 배운 먹물이다. 많이 배우면 배우는 만큼 그만큼 확신이 생기고 의심이 줄어든다. 머리가 영리할수록 함정에 잘 빠지는 이유일 것이다.


어쨌거나 참으로 어렵게 가고 있다. 도방의 주인인 최우가 아닌 최향에게 모든 병권이 있는 것으로 설정해 놓으니 최향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미 힘에서 입도적인데 최우의 자리를 탐하면서도 정작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평판이 신경쓰인다. 세상의 보는 눈이 신경쓰인다. 무도한 찬탈자가 할 대사가 아니다. 그는 이미 승려들을 잔인하게 고문하여 최우의 장인 정숙첨을 모함한 전력이 있다. 일관성이 필요하다.


이미 최우에 비해 힘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에 여유를 부린다. 여유를 부리고 차근히 최우의 목을 조인다. 오히려 힘에서 열세에 있다면 최우가 더 조급해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최향은 여유는 커녕 잔재주를 부리느라 힘의 우위를 살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최우에게 허점만 드러내고 만다. 그같은 상황을 유도한 이장용이야 말로 최향이 품은 독이라 할 것이다. 급하게 하지 못할 것이면 여유라도 부려야 하는데 이것저것없이 잔꾀를 부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아무튼 과연 이를 두고 만능이라 하는 것일 게다. 무예로서도 감히 견줄 수 있는 이가 없다. 지혜에 있어서도 최우는 물론 최향의 가신까지 모두 포함해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 문무겸전에 성품마저 진중하며 신의가 깊다. 호걸이 아니라 선비에 가깝다.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가던 역사속의 김준과는 달리 그는 정해진 길만을 가려 한다. 영웅에 적합하다.


길은 어렵게 가는데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무척이나 쉽다. 오로지 김준의 힘에만 의지하고 김준의 지혜로만 삼으며 김준의 진중함으로 주위를 끌어들인다. 이야기가 갈수록 단순해지는 이유다. 그렇지 않아도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 이야기가 김준과 얽히면 다른 인물들이란 단지 김준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김준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안타까운 이유다. 힘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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