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미국의 문화 가운데 가장 부러워하던 것이었다. 고작 A4지 몇 장 분량의 기획서만으로도 타당성과 가능성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투자를 받아낼 수 있다. 충분한 실력과 가능성만 보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말하지 않던가. 기회의 땅 미국이라고.
버려진 옷가지였다. 우연히 그것을 주웠고 고쳐서 거리로 팔려 나섰다. 하필 그것을 본 것이 그 옷의 원래 디자이너일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옷을 멋대로 고쳐서 팔고 있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그러나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은 그렇게 멋대로 고쳐진 옷에서 놀라운 재능과 영감을 발견한다. 바로 명함을 건넨다. 판타지였을 것이다. 강영걸(유아인 분)과 이가영(신세경 분)이 미국에 가야 했던. 그들은 그래서 미국으로 가야 했다.
오히려 자신의 회사를 등에 업으려던 정재혁(이제현 분)은 정작 그가 만나고자 했던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이클에게 철저히 홀대받지만, 그러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디자인으로 마주친 강영걸은 그의 친구로서 환영받는다. 정재혁을 찾아가 돈을 빌리려다가 철저히 무시당했던 강영걸이 그러나 미국에서는 디자인 하나만으로 최고의 디자이너를 만나 인정받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옷의 디자인과 제작 전반을 책임지고 있던 이가영의 기회이기도 했다. 전화번호조차 없이 공중전화 앞에 하염없이 기다려가며 만든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허세기가 있다. 반쯤은 사기꾼이다. 그러나 뛰어난 사업가란 사기꾼이거나 혹은 허풍선이이기 쉽다. 그들은 모험가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들은 도전한다. 부딪히고 깨지며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다면 그를 위해 주저않고 달려간다. 그러다 실패하면 투자자의 돈을 날린 사기꾼이 될 뿐이지만, 그런 가운데 만에 하나라도 성공을 거둔다면 그들은 대단과 혜안을 가진 성공의 모델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다. 사기꾼이 되거나 선지자가 되거나. 다행스럽게도 동대문에서 짝퉁이나 만들어 팔고 있지만 강영걸에게도 디자인을 보는 눈이 있다. 동대문에서 몸에 익힌 억척스러움은 그것을 기회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점이 강영걸과 이가영이 충돌하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강영걸과 이가영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팀이다. 강영걸은 사업가다. 경영자다. 그에게는 어떻게 성실하게 완성도있는 디자인과 옷을 만드는가 하는 것보다 그것을 어떻게 팔아서 돈을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반면 이가영은 철저한 디자이너다. 옷을 파는 것보다는 아직 옷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이 좋다. 그녀가 보기에 강영걸은 허황되고 제멋대로다. 강영걸이 보기에 이가영은 상당히 쓸모있는 돈줄에 불과하다.
최안나(유리 분)가 강영걸을 따라 그들의 집을 찾았을 때 보인 어색함이 바로 그것이었을 터다. 강영걸은 짐짓 허세로써 이가영을 무시했고, 이가영은 그런 강영걸을 답답해했다. 돈도 없어서 식빵에 우유로 끼니를 때우는데 고기를 먹자고 돈이 있는가 묻고 있다니. 그로 인해 기숙사마저 취소되었는데 얹혀사는 입장에서 고압적이기까지 하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의외로 이가영은 그같은 강영걸의 제멋대로인 모습에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분에서 그는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조여사(장미희 분)과 닮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익숙한 환경을 쉽게 떨쳐내지 못하는 법이다.
물론 앞으로 강영걸의 진심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래야 드라마가 된다. 강영걸에게도 이가영은 인정받아야 하며 진심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강영걸은 단지 이가영에 빌붙는 악덩사장일 뿐이고, 이가영은 강영걸과의 작은 인연으로 한없이 희생하는 우렁각시에 불과할 뿐이다. 자칫 기분나빠질 수 있다. 지금도 강영걸이 보이는 행동들은 황당해하는 이가영의 표정 만큼이나 자칫 비호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라마는 기분이 좋아야 한다. 설사 비극으로 끝나더라도 주인공은 멋져야 한다. 강영걸은 충분히 멋있는 캐릭터다. 조금 더, 이가영의 매력과 시너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 더 멋있어질 필요가 있다.
하여튼 과연 이가영과 관련해 강영걸과 정재혁의 과거기업이 필요했던가. 어차피 지금도 강영걸이나 정재혁이나 이가영에게 어떤 연애감정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감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다. 단지 강영걸과 정재혁이 이가영에게 호의를 베풀려 했을 때 그 동기로서나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과거의 인연이 있었기에 강영걸은 이가영에게 유학비용을 대주고 정재혁은 그녀에게 다시금 패션스쿨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주었다.
역시 한국이라는 것이었을까? 마이클은 과거의 기억 없이도 얼마든지 현재의 디자인만으로도 강영걸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그러나 정재혁과 강영걸은 과거의 기억이 있었기에 이가영에게 기회를 준다. 탤런트를 중요시여기는 미국문화와 관계를 중요시여기는 한국적 문화가 여기에서 극명히 대비된다. 한국드라마는 철저히 관계중심이다. 설사 필요해서 만났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진부한 관습이다. 하다못해 최안나에 대해서까지 강영걸은 이미 예전 그녀의 사진을 보아야 했었다. 정재혁과의 관계가 강영걸과의 만남에 영향을 준다.
아무튼 흥미롭다. 선상반란을 주동한 누명까지 썼다. 그 죄는 무척 크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움직인다. 그런 가운데 혹시나 경찰을 두려워하면서도 강영걸은 기회를 얻고자 미국에서도 뛰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미국까지 도망쳐 온 처지임에도 미국진출을 위한 지사라며 짐짓 허세까지 부리며 최안나와 마이클을 잡으려 한다. 거의 잡았다. 그의 디자인 - 정확히는 이가영의 디자인을 마이클은 사려 한다. 그런데 더욱 조순희의 악의까지 더해지며 경찰의 추격은 집요해진다. 그것은 이가영에게까지 위기가 된다. 강영걸과 이가영이 내연의 관계라는 오해까지 사고 있다. 겨우 손에 넣은 기회와 다가오는 위기, 강영걸이 손에 넣은 기회를 탐하는 정재혁이 열쇠가 될 수 있겠다.
엇갈림이야 말로 드라마다. 모두가 동경한다. 성공이라는 것을. 특히 아무것도 없이 맨손에서 시작해 최고의 부와 명예를 얻는 성공의 드라마라는 것을. 배고픔에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훔쳐먹는 비참함에 흘리는 강영걸의 눈물과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낙천과 집요함에서 흥분을 느낀다. 그래서 마침내 기회를 손에 넣었다. 그에게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위기까지 함께 따라온다. 그는 과연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그는 과연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원하는 성공을 이룰 수 있을까? 이가영의 선량함은 그런 강영걸을 지탱한다. 그같은 강영걸의 억척이 이가영의 성실함과 대비된다. 그들은 팀이 될 것이다. 그들은 드라마를 만들 것이다.
재미있어지고 있다. 처음의 어수선함이 어느새 정리되며 하나의 큰 줄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이 한 가지를 위한 것이다. 길거리에서 먹다 남긴 패스트푸드를 훔쳐먹으며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마이클과 만나 중대한 제안을 받는 그 순간을 위해. 갈 길은 멀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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