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왕과 왕세자, 왕제, 로열패밀리의 이유 - 선거에 즈음하여...

까칠부 2012. 3. 30. 17:29

전근대의 봉건사회와 근대의 시민사회를 구분짓는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천박'일 것이다. 당시 많은 귀족과 지식인들이 새로운 부르주아지들을 두고 비판했었다. 돈만 아는 천박한 것들이라고. 하물며 노동자 농민은 부르주아지마저도 경멸해마지 않던 비천한 존재였을 것이다.


고귀하다고 하는 것은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뜻일 게다. 나라와 백성, 혹은 천하와 대의, 그래서 신분이 귀한 이들은 몸가짐조차 무겁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한 신분에 지켜야 할 예법이란 복잡하고 정교하기로 악명이 높다.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을 이룬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에 와서도 왕이며 왕세자, 왕제 등의 고귀한 신분에 집착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현실에는 없는 특별한 신분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구일 것이다. 특별한 신분을 통해 자신도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로맨스판타지의 이유다.


다른 하나는 특별한 신분 그 자체에 대한 동경일 것이다. 나와는 다른 존재, 나나 내 주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태생적 권위와 우아함에 대한 본능적 추구일 것이다. 나를 대신할 누군가. 그래서 나오는 말이 국가와 국민, 그리고 지도자라는 단어일 것이다.


원래 민주주의란 자체가 인간의 본능과는 거리가 먼 제도다. 태초의 인간은 원숭이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에 복종하며 따랐었다. 그는 모든 위험을 대신하며 모두의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말 그대로 리더였을 터였다. 리더에 일방적으로 복종함으로써 원숭이들은 풍요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정치제도란 가장 훌륭한 리더다.


그런데 억지로 민주주의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시민이 주인이 되었다.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었다. 부담스럽다.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대안을 찾게 된다.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으려 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특별한 존재를 쫓고자 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그럼으로써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대신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흔히 말하는 인물론이다.


인물이 좋아야 정치도 잘된다. 인물이 좋아야 정치도 잘한다. 그 말의 이면에는 뛰어난 인물이라면 나머지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일단 뽑아만 놓으면 알아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모두를 위해 올바른 정치를 펴리라는 막연한 기대다. 정당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정책이 달라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국가와 국민이라는 한 가지로 수렴한다. 그는 이미 왕이다. 그렇게 기대하고 그렇게 대한다. 그렇게 실망하고 그래서 분노한다.


시민이란 개인이다.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란 그다지 넓지 않다. 무엇보다 바쁜 일상 속에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 자체가 크게 좁을 수밖에 없다. 사실 왕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자라 해서 다르지 않다. 다만 왕은 자기의 가족과 주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단지 자신과 주위만 바로 살피는데도 나라 전체가 좋은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이 더 관심을 끌게 된다. 사소한 개인의 문제가 그러나 국가적인 큰 이슈가 된다. 개인의 인정과 연민이 보편적 정의와 가치와 가 닿는다. 이를테면 <해를 품은 달>에서 허연우에 대한 이훤의 사랑이 조선의 왕권을 바로세우는 중대한 가치와 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실망한다. 분노한다. 고작해야 시민이란 이런 것인가. 시민이 추구하는 정치란 이런 것인가. 그래서 더 기대하게 된다. 더 큰 것을 짊어질 존재를. 더 많은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아마 지난 대선에서 필자가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한 마디였을 것이다.


"그 분이 다 해주실 거야."


누가 다 해주는가? 누가 무엇을 다 해주는가? 민주사회에서 자신을 대신할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다. 왕을 뽑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대신해줄, 모든 책임을 대신 짊어질 존재를 뽑는 것이다. 막연히 기대하고 막연히 분노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물을 찾는다. 더 훌륭하게 모든 것을 대신해줄, 대신해서 책임을 짊어질 누군가를. 그리고 그런 대중 앞에 진정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고 짊어질 특별하고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나타난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운명지어지기를 그렇게 운명지어졌다.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그것이 마음먹은대로 쉽게 되지는 않는다. <더킹 투하츠>의 철부지왕제 이재하(이승기 분)가 그러하다. 제멋대로인 왕제이지만 다름아닌 왕제의 신분이기에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주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싫어서 발버둥도 쳐 보지만 그 또한 순응할 수밖에 없다. 평범한 개인이라면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는 이미 리더다. 타고난 리더. 그리고 그가 짊어져야 하는 것들.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도피처로 딱일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도 그래서 사람들은 세종대왕과 같은 정치인을 원하고 있었다. 세종대왕처럼 모든 것을 자기가 다 알아서 처리하는 그런 정치인을 기대하고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가족마저 외면하며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어쩌면 그래서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왕권강화란 좋은 의미로 들리고 있을 것이다. 신하의 권리가 - 사대부의 권리가 강한 것은 비정상이다. 하물며 현실의 정치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개인에 의한 정치다. 세종대왕과 같은 이가 나온다면.


하지만 말했듯 그것이 바로 시민이다. 왕 또한 다르지 않다. 왕이라는 신분이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 뿐이다. 왕의 개인재산이 나라의 부다. 왕의 개인적 성취가 나라의 성취다. 하지만 보통의 개인이라면 개인의 부는 단지 개인의 부일 뿐이다. 개인의 성취란 개인의 성취다. 왕은 자신의 소유인 나라를 위하지만 사대부는 단지 개인과 가문, 혹은 파벌의 이익만을 챙길 뿐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같은 개인을 전제한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에만 충실한다. 그것이 집단을 통해 조화를 이룬다. 대화와 타협이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느리다. 비효율적이기까지 하다. 전제왕조시대에 뛰어난 군주가 있다면 그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뚝딱 바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독재자의 말이 곧 법이고 정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길고 지루한 토론과 협의의 과정을 거친다. 그런 대신 견제가 이루어진다.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가 서로 충돌하며 절충점을 찾아낸다. 그 가운데는 필경 자신의 몫도 있을 것이다. 애써 외면하고 그저 남에게 기대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싸움 가운데 자신의 몫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탐욕도 이기도 어떤 악의도 저버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하는 것. 실수와 잘못 역시 그렇게 모두가 끌어안고 간다. 그래서 느리되 실수가 적다. 최소한 책임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싫다. 항상 옳아야 하고 절대 틀려서는 안된다. 바른 정치가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독재자를 꿈꾼다. 위대한 독재자를. 선량하고 현명한 따뜻한 권력을. 그래서 인물을 찾고 왕을 꿈꾼다. 누가 더 뛰어난 인물인가? 누가 더 모두를 대신할 훌륭한 인물인가? 누가 왕을 대신할 만한가? 그것이 다시 무의식속의 왕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한 점 흠결없는 완전무결한 왕이다. 그는 왕이 된다.


천박하지 않은 것. 이기적이지 않은 것. 탐욕스럽지 않은 것. 보편적인 것. 이타적이고 정의로운 것. 현실에 없는 판타지를 대중문화를 통해 투사한다. 위대한 권력자. 현명한 군주. 인자한 지배자. 그들은 고귀하고 우아하다. 왕이 왕답다는 건 무척 아름다운 일이다. 믿음직하고 자랑스럽다. 모두가 동경하고 간절히 바라는 바일 것이다.


선거에 즈음하여 문득 떠올리게 된다. 인물에 투표하라. 좋은 인물에 투표하라. 하지만 인물이란 무엇인가? 과연 인물이 좋다면 그는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하게 될 것인가? 그는 왕이 아니다. 나와 똑같은 시민이다. 그 인물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쓰일 것인가?


인물보다는 정책이다. 인물보다는 이념이다. 그가 추구하는 이기다. 그가 추구하는 욕망이다. 그의 이기와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가? 그것은 나의 이기와 욕망에 부합하는가? 그렇게 수많은 이기와 욕망이 있다.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고 견제하며 공존한다. 그렇게 정치는 이루어진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투박하고 거친 정치다. 아마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거추장스럽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피로일 것이다.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이다.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구세주다. 판타지다. 모든 것을 대신한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해서 책임져준다. TV에 왕이 많은 이유다. 왕에게 기대려 한다. 현실에서 없는 것을 왕에게 찾으려 한다. 아마도. 이유일 것이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