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소중한 보물이 하나 있다. 단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주는 값진 보물이었다. 그렇게 믿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터무니없는 가짜였다고 말한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 갖다 버린 쓰레기에 불과했다고 한다. 과연 그 순간의 감정이란 어떠할까?
기억속에 가장 소중한 장소였다. 가장 기쁘고 행복했던 시간을 그곳에서 함께 보냈다. 마음의 고향처럼 항상 돌아가고 싶던 그런 그리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름다운 연못으로 기억되고 있던 그곳이 사실은 썩은 물만 고인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는 더러운 오물들이 고여가고 있었다. 지독한 악취가 머리가 아프도록 진동한다. 어떨까?
이가영(신세경 분)은 지금 모욕당하고 있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기에. 차마 놓아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감정과 경험이었기에. 그러나 그것이 더럽혀지려 한다. 사실은 가짜라고 말한다. 아니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소중했기에 더욱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그녀를 괴롭힌다.
하여튼 남자라는 동물이 그렇다. 그렇게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다.
"내 여자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정재혁(이제훈 분)의 솔직한 속내가 드러나고 만다. 그가 이가영에게 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자신이 머물 곳을 가지고 싶어한다. 강영걸(유아인 분)의 공장 한켠에 이가영이 지친 몸을 누이는 초라한 침대 위에 전기장판의 온기를 느껴본다. 이가영이 처음으로 가져본 그 따뜻함이다. 강영걸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고 떠나는 차안에서 그는 이가영의 손을 쥐었다 놓는다. 정재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최안나(유리 분)도 이가영도 아니다.
아버지(김일우 분)는 그에게 누구보다 엄격하다. 어머니(이혜숙 분)의 사랑은 항상 일방통행이다. 어디에도 그가 머물 자리는 없다. 어디에도 그가 마음을 붙이고 쉴 수 있는 곳이란 없다. 그래서 더욱 그는 자체명품브랜드에 집착한다. 그것은 정재혁 자신이다.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한때 최안나는 그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으며 지금은 그 증거가 되어주고 있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인 최안나를 직접 자기 손으로 지켜줄 수 있다.
과연 정재혁의 최안나에 대한 그같은 감정이 사랑이기는 했을까?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가영에 대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가영을 연민한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위로받는다.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 보살피며 사람은 위로를 받는다. 갈 곳 없는 고양이를 보살피면서도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보살핌을 받는다. 그가 바라는 따뜻함이다. 최안나든 이가영이든 전적으로 자기에게 의지해 주는 것,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되는 것. 그래서 더욱 이가영의 강영걸에 대한 일방적인 올곧음이 부럽고 탐난다. 가지고 싶다.
아마 정재혁의 이가영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 한다면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정재혁이 어느 순간 잃은 가장 소중한 한 부분이었다. 정재혁이라는 인간을 완성하기 위한 가장 소중한 한 조각이었다. 그것을 이가영도 안다. 강영걸에 대한 실망 만큼이나 그래서 이가영도 그에게 끌린다. 정재혁은 그를 원한다. 간절히 그를 필요로 한다. 그의 곁에는 이가영이 머물 곳이 있다. 강영걸에게는 그녀가 머물 곳이 없다. 강영걸은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가영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인 이기만을 드러내는 강영걸에 대한 절망이다. 이기적인 욕망 속에 타락해가는 강영걸에 대한 이가영의 절망이다. 그녀도 기댈 곳을 찾는다.
어쩌면 정재혁의 아버지 정만호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이 사회를 피곤하게 하거든? 남들이 잘되면 배나 아파하고,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쟤는 나보다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왜 나보다 잘 잘먹고 살아? 그러다 보면 삐딱해지는 거야. 그러다 보면 혁명이 일어나는 거고."
참으로 비루하다. 아마 예기에서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형벌은 대부에 미치지 못하고 예의는 뭇백성에 이르지 않는다. 고귀한 사람에게는 형벌이 없고 비천한 사람에게는 예의가 없다. 스스로 비천하다 여긴다. 스스로 가치없다 여긴다. 그래서 자신의 양심조차 가치없다. 자신은 물론 이가영의 양심조차 가치없다. 그것이 얼마나 이가영에게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운 일인가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정재혁에 대한 일그러지고 뒤틀린 열등감만이 그를 지배한다.
물론 강영걸에게 아주 능력이 없지는 않다. 미국 뉴욕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 마이클이 그를 입증해 주었다.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던 사채업자 황태산(이한위 분)도 그의 수완에 넘어가고 말았다. 정재혁이 강영걸에게 당한 그 상황이야 말로 그의 비열하지만 상대의 미처 대비하지 못하는 약점을 찌르는 영리함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게는 돈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능력이다. 돈이 모든 수단이 된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돈이 없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봐도 필요한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강영걸이 정재혁에게 갖는 비틀린 열등감의 이유일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데 정재혁은 아무것도 않고 저와 같은 대단한 지위에 있는가? 하필 강영걸과 정재혁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기까지 했다. 차라리 전혀 격이 다른 대단한 학교 출신이었다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학교 출신에 별로 자신과 같은 간절함이나 절박함도 없이 노력도 그다지 않는 것 같은데 강영걸이 바라는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들을 정재혁은 이미 누리고 있다. 정재혁의 매몰찬 대응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재산이 열 배 쯤 많은 사람한테는 욕을 하고, 백 배 쯤 많은 사람은 두려워하고, 천 배 쯤 많은 사람 밑에서는 그 사람을 위해 일을 하고, 자신보다 재산이 만 배 쯤 많은 사람에게는 기꺼이 노예가 된다."
한 마디로 만만하게 보인 것이다. 정재혁으로 인해 경찰에 체포되었다 여기고 복수하기 위해 무작정 찾아가던 그 모습처럼. 평등하지만 결코 평등하지 않은 현대사회가 갖는 비틀린 일면일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기도 한데 아무리 손을 뻗으려 노력해봐도 전혀 닿지 않는다. 기대는 실망이 되고, 실망은 절망이 된다. 절망은 다시 증오로 바뀐다. 증오는 상대만이 아닌 자기 자신마저 휩쓸고 만다. 정작 사람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인 때문이다. 증오가 사람을 비루하게 만드는 이유다. 차라리 정재혁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감옥쯤은 얼마든지 다시 들어가 줄 수 있다. 정재혁의 어이없는 웃음이 아마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그래서 강영걸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는 상처입은 울음과도 같다. 먹먹하게 꽉 막힌 울부짖음처럼 들린다. 적어도 너에게 엿은 먹을 수 있다며 정재혁에게 말하기 전 잠시의 간격이 그것을 말해준다. 지금의 상황이 모멸스럽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자신이 비참하기까지 하다. 자신조차 그것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다. 그는 약자니까. 양심마저 저버리고, 존엄마저 내던진 채, 이가영조차 놓아버리고 있다. 강영걸이 최안나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정재혁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강영걸 자신이 상처입는 만큼 이가영도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비루함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납득하고 정당화한다. 비굴한 것이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신마저 내던지려 하고 있다.
참으로 미묘하다. 의도한 것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럼에도 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제 울음이었을까? 그의 울부짖음이었을까? 대사와 대사 사이, 표정과 표정 사이, 행동과 행동 사이, 그 약간의 머뭇거림들이. 그 잠시의 간격들이. 그럼에도 보이는 일그러진 독기가. 자칫 비호감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여주인공 이가영이 받는 상처만큼 그를 좋아하던 시청자들에게 상처로 돌아갈 수 있다. 악의가 쌓인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간다. 그의 성공을 기뻐하기보다 그의 파멸을 기대하게 된다. 지금으로서 정재혁에게 마침내 크게 한 방 먹이기는 했지만 그의 성공을 바라기보다 그에 따른 댓가를 치르기를 바란다. 이가영이 더 이상 울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여자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다 말고 벌떡 일어나 소주를 들이키게 만드는 남자는 남자의 자격이 없다.
아무튼 디테일하다. 강영걸을 찾아온 최안나를 정재혁의 차를 타고 돌아오다가 마주쳤을 때, 이번에도 역시 최안나에게 노골적인 관심을 보이는 강영걸에게 상처입은 표정을 지으며 이가영은 얼굴에 클렌징크림을 덕지덕지 펴바르고 있었다. 마치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화장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지우려는 듯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진정 그녀가 지우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강영걸에게 폭행당한 정재혁을 부축하며 그녀는 지친 눈으로 강영걸을 보고 있었다.
한동안 강영걸이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강영걸에게 향하는 비난과 비례해 정재혁에게는 동정이 쏟아질 것이다. 그보다는 이가영을 연민하게 된다. 최안나는 아직 모르겠다. 악역이라기에는 너무 가엾고, 그렇다고 동정하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아프다고 악을 쓰면 안쓰럽던 마음도 짜증으로 바뀌게 된다. 대사를 줄일 필요가 있다.
패션보다는 역시 멜로라는 점이 아쉽다. 패션왕으로 성장하는 과정보다 그 과정에서의 인물들 사이의 감정에 주력한다. 사랑하고 엇갈리고 오해하고 서로 증오한다. 원망하고 갈등하며 부딪히고 화해한다. 아니 화해란 있을까? 매력적인 배우들이라 크게 불만은 없다. 매력적인 배우들인 만큼 서로에 대한 격정으로 허우적대는 모습이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다만 처음 드라마가 시청자에 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생각할 필요는 있겠다. 방향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서로 엇갈리기 시작한다. 강영걸과 이가영, 이가영과 정재혁, 정재혁과 최안나, 최안나와 이가영, 최안나와 강영걸 사이만 아무것도 없다. 강영걸로 인해 이가영은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에 젖은 눈으로 정재혁을 본다. 강영걸은 분노하고 이가영은 마모되어간다. 지쳐간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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