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골든타임 - 끝맺지 못한 말, 저 의삽니... 출발이 만족스럽다.

까칠부 2012. 7. 10. 07:16

예전 구급법에 대해 배울 때 강사가 강조하며 한 말이 있었다.

 

"최대한 현장을 보존하고 전문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라."

 

이를테면 교통사고로 인해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게 된 어느 유명인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무리하게 그를 구해내기 위해 들어 움직이는 바람에 오히려 부서진 뼈가 신경을 건드려 아예 몸을 못쓰게 되고 말았다. 그냥 현장에 사고가 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구급요원들이 사고가 일어난 그 모습 그대로 병원으로 후송해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그의 모습은 크게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구급법 배웠다고 함부로 나섰다가는 살릴 목숨마저 어이없이 죽게 만들 수 있다. 결국 살리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까 그저 배워만 놓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전문가가 도착해서 해결하기까지 현장을 최대한 보존하고, 가능한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어떻게 사고가 일어났고, 사고가 일어난 순간 피해자는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언제 사고가 일어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가? 바로 이민우(이선균 분)가 해운대세중병원에 도착해서 한 행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그같은 정보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된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도 어쩌면 그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특이한 드라마일 것이다. 명색이 의학드라마다. 그런데 전혀 의사같지 않은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차라리 인성에 문제가 있었으면 있었지 지금까지 의학드라마 가운데 이처럼 의사로서 무책임한 주인공은 없었다. 실력이 부족한 경우는 있었어도 이렇게까지 의사로서의 자각이 부족한 경우는 없었다. 영웅조차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다. 연쇄추돌사고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데 의사랍시고 나서서 혼자서 해결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19 구급대원들이 그래서 돋보인다. 인명구조에는 의사보다는 이들 119 구급대원들이 프로페셔널이다.

 

의사로서의 자각은 없지만 해야 할 일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천하는 이민우와 사람을 살리겠다는 의지는 있지만 의지만 앞서는 강재인(황정음)과 의사로서의 사명과 실력을 모두 두루 갖춘 외상외과의 베테랑 최인혁(이성민 분), 그리고 그런 최인혁을 곁에서 보좌하는 베테랑 간호사 신은아(송선미 분), 당연히 의학드라마라면 빼놓을 수 없는 병원내 정치가 있다. 한국 의료계의 현실을 보여주듯 가장 생명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홀대받는 외상외과를 중심으로 병원내 군상들과 욕망이 보여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다. 그들은 의사가 되려 한다.

 

어쩌면 구태의연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의사로서의 자각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의사로서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의사임을 간절히 원하도록 만든다. 의사가 아닌 자신에 분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분노가 자신을 떠민다.

 

하필 아이였다. 하필 여자아이였다.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다. 의사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반드시 살려야 하는 대상이었다. 더구나 의사였다. 의사가운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죽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자신이란 대체 누구인가? 무엇인가? 최인혁(이성민 분)의 한 마디가 인간으로서의 그의 존엄을 건드린다. 의사냐고 묻는 택시기사의 물음에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네, 저 의삽니..."

 

한 번 대화조차 나누어 본 적 없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미안함보다, 그렇게 무력하게 아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나, 분노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도대체 자신이란 어떤 존재인가? 누구이며 무엇인가? 의사로서의 자각이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자각이다. 사람들의 의사들에 대해 '선생님'이라 부르며 경외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든 의사는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지금도 누구나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직업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민우가 가게 될 곳이 아마도 해운대세중병원 외상외과일 것 같다. 가장 치열하게 생명과 맞서싸우는 곳이다. 직접 칼을 들고 죽음과 맞서 싸워야 하는 곳이다. 가장 나태하던 이가 가장 첨예한 현장으로 가게 된다. 다만 이민우의 외국드라마 마니아로서의 경험이 과연 의사로서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서툴지만 기본은 확실한 독특한 캐릭터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웅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의도 아니고, 대단한 천재도 아닐 테지만, 그러나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점점 성장해간다.

 

강재인은 어쩌면 이민우의 반대편에 선 캐릭터일 것이다. 꾸밈없고 거침없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러나 때로 마음만 앞선다. 구김살없이 자란 티가 난다. 세상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세상에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거나 힘들게 만들 일이란 어디에도 없다. 영웅의 자질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영웅이 되기에는 아직 실력면에서 이민우만 못한 듯 보인다. 충돌한다. 의지와 현실이. 무모한 용기와 비겁한 지혜가. 최인혁은 완전체다. 이성민이 간만에 진지한 긍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하필 같은 의학드라마인 전작 덕분에 잠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중심으로서의 무게감에 우려를 갖는다. 배우로서의 역량은 충분하지만 캐릭터에 있어 자칫 가벼워질 수 잇다.

 

기대한다. 흔한 의학드라마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단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외과의사가 있고, 의사로서의 사명과 현실적 야심이 그 앞에 놓여 있다. 병원내 욕망과 갈등과 혼란은 기본이다. 아니면 생명과 의술이라는 본질을 쫓는 휴먼드라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드라마다. 굳이 따지자면 마지막 휴먼드라마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이민우와 천재는 어울려 보이지 않으니까. 의사로서의 사명이나 야심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인간적 분노가 먼저다. 주인공의 한심함이 눈을 잡아끈다. 강재인의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태도 역시 대비를 이룬다. 그림이 만들어진다.

 

만족스런 첫회였다. 만족스런 만남이었으며 만족스런 인연과 어울림이었다. 정석적이지만 그만큼 단단하다. 단번에 이민우의 캐릭터를 각인시켜버렸다. 그가 주인공이다. 아직 최인혁은 평면적이며, 강재인도 그다지 보여진 것이 없다. 점차 풀어갈 이야기일 것이다. 재미있었다. 기대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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