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서바이벌의 범람과 심사위원 논란, 획일화를 우려하다.

까칠부 2012. 9. 29. 10:07

문화란 보편적 양식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흔히들 오해하고는 한다. 문화예술이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답에 가까운 무엇이 있을 것이다.

 

서바이벌 양식의 프로그램이 범람하면서 그에 비례해 심사위원의 역할 또한 무척이나 커지게 되었다. 누가 심사위원인가에 따라 심사의 결과가 달라진다. 심사의 내용에 따라 남는 자와 떨어지는 자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다. 보편적 정의를 믿는다. 오디션이란 또 하나의 시험장에서는 객관적 기준에 따라 공정한 평가가 내려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심사위원의 말 한 마디가 프로그램이 끝나면 인구에 회자되는 것일 게다.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어떻다더라. 물론 자기만의 기준이 있다. 그에 공감하는 다수의 기준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다수라 하더라도 개개의 다수가 모인 집합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개인이며 개인으로서 그같은 판단과 선택을 내린 것이다.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심사위원은 보다 전문적이다.

 

사실 이것도 헛점이다. 전문적이라는 것은 그 분야에 대해 매우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 판단의 기준 또한 누구보다 선명할 수밖에 없다. 좋다와 나쁘다의 경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고 그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 근거 또한 보통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매우 깊은 전문적 내용일 경우가 많다. 그들의 모든 판단을 과연 보통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이해해서 도대체 무엇하려는가?

 

평론가가 좋다 말해도 내가 싫으면 싫다. 평론가가 아무리 혹평을 해도 내가 좋은 작품이라 여기면 좋은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작품이 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영화, 자기만의 소설, 자기만의 음악이 있다. 그것을 누가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것이 주관이다. 그것이 예술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범람에 대한 불편함이다.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참가자 가운데 한 사람을 골라내려 하다 보니 광범위하게 어떠한 특정한 기준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조차 결국은 심사위원이나 제작진 자신의 주관적 판단과 선호에 의한 기준이다. 그들 자신도 모른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절대적인 기준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그런데도 믿는다. 서바이벌이 내세우는 공정함으로 인해. 심사위원들은 과연 자신들을 대신해 누구보다 공정하게 납득할 수 있는 판단을 내려줄 것이다.

 

그래서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심사평에 대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것은. 대개는 좋은 내용은 없다. 한 사람의 인격과 인성이 그것으로써 난도질당한다. 어째서 그런 심사를 할 수밖에 없었느냐?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바로 심사위원석에 앉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온갖 음모론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개인의 명예나 존엄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아마도 개인이 무시당하는 문화에서 살아온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생각이란 크게 가치가 없다. 개인의 입장이나 개성이란 때로 거추장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개인을 양보하고, 개인을 삼가고, 그리고 모두에 맞춘다. 모두라는 이름의 권위에 맞춘다. 모두란 권위가 된다. 대중이 권력이 된다. 그들의 요구에 맞춰주는 개인만에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다.

 

서바이벌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서바이벌에 참가한 수많은 개성들이 몇몇 협소한 기준에 의해 가려지고 걸러지는 것이다. 아마 지금껏 이름이 전해지는 대단한 음악인들 가운데는 서바이벌에 출전했다면 일찌감치 탈락했을 강한 개성을 지닌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조차 대중에 의해 다시 걸러지고 만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합격자로서. 오히려 어쩌면 오디션을 가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수많은 개성들마저 오디션에 맞춰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서바이벌에서 탈락했어도 피아는 피아이기를 바란다. 로맨틱펀치는 로맨틱펀치였으면 싶다. 해리빅버튼이 서바이벌에서 탈락했다고 서바이벌에서 승리하기 위한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게 되면 그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일까? 그러나 서바이벌의 대전제인 생존을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심지어 그동안 자기가 음악을 잘못해 온 것 같다며 자아비판까지 하게 된다.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심사위원이 어떤 팀에게 40점의 점수를 줬다.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고 듣기에 그만한 가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가 담보는가? 바로 그 자신이다. 그것이 그의 명예과 명성이다. 그의 자존이며 존엄이다. 자기 이름을 걸조 점수를 준다. 이름값을 너무 쉽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높은 점수를 주기도 어렵지만 아주 낮은 점수를 주기도 무척 어렵다. 그럼에도 그런 점수를 주었다면 나름의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개인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 평가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 심사위원들을 제작진이 섭외해서 프로그램을 위해 배치한다. 편집 또한 제작진의 손을 거친다. 거기서 프로그램의 개성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시청자는 본다. 당연한 구조다.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구조다.

 

남이 대신해주지 안는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울고 웃고 감동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자신이 한다. 단지 참고는 된다. 일희일비할 것 없는 심사위원 개인의 선택이고 개성이며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특성이다. 그 가운데 다양성이 있다.

 

한국사회의 획일성을 걱정한다. 서바이벌로 인해 그것이 더욱 가속화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우려된다.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고작 TV프로그램일 뿐임에도. 안타깝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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