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착한 남자 - 빗속에 버려진 도시락, 오랜 미련이 마침내 끝을 맺다.

까칠부 2012. 10. 5. 09:35

그것은 한재희(박시연 분)의 마지막 남은 순수였을 것이다. 오래전 순수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 자신의 진심을 담아 강마루(송중기 분)를 위한 도시락을 준비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서 서은기(문채원 분)를 안고 있는 강마루와 마주하고는 조용히 도시락을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서은기를 위해 먹을 것을 사러 가던 길에 강마루도 그것을 보지만, 이내 아무일없이 그대로 무심히 스쳐지나가고 만다. 도시락은 그렇게 그들의 마음처럼 빗속에 버려진다.

 

사랑했었다. 아니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고, 남자 또한 여자를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자는 사랑받기만을 바랐고, 남자 또한 사랑해주기만을 바랐다. 여자가 비로소 남자를 사랑하기를 바랐을 때는, 그리고 남자가 비로소 사랑받기를 바라게 되었을 때는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있었다. 여전히 여자는 자신을 더 많이 사랑했고, 남자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차라리 한재희가 더 이기적이었다면.

 

차라리 한재희가 더 이기적이어서, 더 독하고 모질어서, 그래서 그때에도 여전히 강마루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 말했다면 강마루는 지금까지도 한재희의 곁에 머물며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녔을 것이다. 필요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자기에게 간절히 필요한 존재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한재희를 위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한재희가 오빠 한재식(양익준 분)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음성메시지를 듣고서 서은기마저 버려둔 채 한걸음에 달려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고 연기였다.

 

거짓말이 나쁜 이유다. 속이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소외시키는 것이 나쁜 것이다. 가치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하찮은 주변의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그와 진심을 나눌 수 없다. 그로부터 진실을 들을 수 없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에게 전혀 진지하지 않다. 전혀 진심이 아니다. 자신의 진심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을 타자로써, 객체로써, 그저 수단으로써만 대하고 이용할 뿐이다. 버려진 것 같다. 그토록 서은기마저 버려두고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말한다. 연기였다고 말한다. 자신은 버려졌다.

 

차라리 한재희에 대한 원망조차 사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전혀 타인이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그 한재희가 아니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허튼 꿈이고, 허튼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비로소 긴 꿈에서 깨어나듯 강마루는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한재희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그 한재희가 아니고 그런 한재희를 강마루 자신 또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한재희에게 마지막 작별을 전하는 강마루의 표정은 그래서 잔인하도록 무심하다. 한재희는 그로부터 시린 공포마저 느끼게 된다. 자포자기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강마루가 한재희를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만다.

 

한재희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그 순간이 서은기에 대한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직 막연한 호감이고 연민이고 고마움이고 미안함이었다면, 한재희에 대한 절망은 서은기에 대한 갈망으로 바뀌고 만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인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까지 한재희를 사랑했고, 한재희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 다른 누군가를 찾아 사랑을 한다. 그에게 가장 절망스러웠던 것은 가난도, 짓눌린 현실도 아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순간에도 한재희를 사랑했고, 이제는 다시 서은기를 사랑하게 된다. 한재희와는 끝내 가지 못했던 그곳에서 서은기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는 서은기가 그의 사랑이다.

 

하기는 바로 서은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재희의 거짓말을 알아냈을 때. 그로 인해 시린 분노와 서러운 절망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러나 그런 그를 붙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사랑한다 말해준 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져 사랑한다 말해준 사람이었다. 한재희와는 달리 오로지 간절히 자신만을 원해주는 사람이었다. 강마루에게 의지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녀의 체온에 기대어 마음을 놓는 것은 강마루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두고 반려라 하는 모양이다. 한재희와 함께 있는 강마루를 보고서도 서은기는 그에 대한 마지막 믿음을 가지고 그에게 사진을 보낸다. 강마루와 함께 오기로 했던, 한재희와 함께 오고자 했던 바로 그곳의 사진을. 서은기가 있기에 강마루는 강해질 수 있다. 비로소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버리고, 어떤 소중한 것을 희생해가며 여기까지 왔는가를. 그래서 더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 만일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난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부질없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그리고 손에 들린 그녀의 마지막 수단, 다행히 서회장의 건강도 상당히 악화된 상태다.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아니 그것은 마지막 유혹이었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갈림길에서 그녀는 선택한다. 강마루가 서은기를 만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마루에게 한재희는 과거였다. 아니 이제 실제로 과거가 되어 버렸다. 한재희에게도 이제 강마루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지나간 과거다. 대신 강마루에게는 서은기라는 지금이 있다. 그리고 아마도 서은기는 그의 미래가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한재희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모든 것을 놓아두고 버려두고 온 그녀에게 다시 돌아갈 곳이란 없다. 같은 도시락을 놓아두고 스쳐지났어도 강마루에게는 자신의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서은기가 있었고, 한재희는 자신의 배신에 분노하는 서회장이 있었다. 그녀는 막다른 곳에서 막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갈 수 없는 가엾은 그녀의 숙명이다. 하마트면 강마루 또한 휘말릴 뻔한 비극의 길이다. 그렇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엇갈린 선택을 하게 된다. 엇갈린 삶을 살게 된다.

 

이제는 차라리 징그러울 정도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절망과 자포자기 속에 놓인 남자의 모습을 송중기는 훌륭히 연기해 보이고 있다. 잘생겨서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그런 송중기 앞에서 문채원은 올곧게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지나침 없이 꽉차게 연기해내고 있었다. 박시연의 어색함마저 한재희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세 명의 남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어떤 삶을 그리고 어떤 결망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뻔히 알면서도 궁금해지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캐릭터가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가 살아있다. 재미있다는 뜻이다.

 

고비를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강마루는 서은기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깨닫게 되었다. 서은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강마루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재희는 강마루와의 관계를 단절한 채 절망 속에 막다른 선택을 한다. 악의는 없지만 악해질 수밖에 없는 그녀의 절박함이 드라마를 격동시킨다. 이제는 사랑하게 되었으니 사랑하는 남녀를 보여줄 일이다. 그리고 악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마지막을 보게 된다. 좋다. 매력적이다. 눈을 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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